여자 바둑도 한국이 석권한다

지난 7월 19일, 박지은 7단이 낭보를 전해왔다. 중국 윈난성 대리에서 벌어진 제1회 대리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 우승 소식이었다. 결승 상대는 같은 한국의 김혜민 4단. 박 7단은 세 살 아래의 후배를 맞아 첫 판을 내주었으나 2, 3국을 연승하면서 우승컵을 안았다. 특히 최종 3국은 7집 반을 공제하는 중국식 룰에 따라 딱 반 집을 이김으로써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대회는 중국 다리(大理)시가 스폰서의 도움으로 자국 여류 기사들의 우승을 기대하면서 야심차게 개최했던 대회. 주최국의 권한으로 중국은 대거 8명이 출전하는 인해전술(?)을 폈다. 한국과 일본은 각 6명이 초청됐다. 대회 장소와 출전자 수 등에서 주최국 중국의 우승은 떼놓은 당상인 듯 했다.

하지만 한국 낭자들은 초반부터 무서운 기세로 이겨나가더니 4강을 독점해 버렸다. 준결승서 박지은은 여류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루이나이웨이를, 김혜민은 김은선을 따돌렸다.

작년 11월의 일이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김이 새 버린 중국측은 결승전을 무기 연기해 버렸다. 급기야 한국 출전 기사들은 한국기원에 밀린 대국료라도 빨리 지급하도록 힘써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기원의 중재로 이번 결승은 무려 8개월 만에 치러질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엔 제5회 정관장배가 바둑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국이 주최하는 정관장배는 당초 여류 토너먼트 대회로 출범했다가 2004년 제3회 대회부터 여류 국가대항 단체전으로 바뀐 대회. 여기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세에 밀려 5명 중 4명이 조기 탈락했으나 최종 주자(5번) 이민진 5단이 기적적인 5연승으로 한국에 역전 우승을 안겼다. 앞서 3회와 4회 대회 때 중국이 가져갔던 패권을 멋지게 탈환해 온 것이다.

개인전 형식으로 치러졌던 1회(2002년) 정관장배 때는 루이나이웨이가, 2회(2003년) 대회 때는 박지은이 각각 정상에 섰다. 대회 방식은 바뀌었어도 한국은 5년 간 총 네 차례 패권을 차지한 셈이 됐다. 여자 기사들이 남자 기사들의 성적을 오히려 상회한다는 얘기가 오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자 국제대회의 수명은 꽤 짧은 편이다. 각국 선수들의 저변이 남성 기사층에 비해 워낙 엷어 남자 대회만큼의 홍보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유야 어쨌든 정관장배를 제외하면 현재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여류 국제대회는 하나도 없다. 최근 우승자를 가려낸 다리배 역시 내년 2회 대회 속행 여부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2002년에 열렸던 호작(豪爵)배도 제1회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 버렸다. 역시 중국 주최였던 이 대회 역시 결승은 한국 기사끼리의 잔치로 벌어져 윤영선 2단(당시)이 박지은 3단(당시)을 2대0으로 제치고 패권을 차지했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 주최의 여류 세계기전이 잇달아 단명으로 그치는 원죄(?)는 한국 여류들의 독주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 여류 최강자라면 예나 지금이나 루이나이웨이 9단이 꼽힌다. 비록 최근 몇 년 사이 몇 개 타이틀을 양보(?)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그녀는 세계 정상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당시 세계 여류대회는 오로지 루이를 위한 무대라고 말해서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최초의 국제 여류 프로대회는 보해컵. 95년 시작된 1회 대회서 루이는 중국 펑윈을 꺾고 원년 챔프에 올랐고 이듬해 2회 때는 한국 이영신을 상대로 다시 패권을 차지했다. 3, 4회 역시 루이의 몫이었는데 두 번 모두 펑윈이 결승전의 제물이 됐다. 98년 제5회 때는 루이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중국 장쉔이 한국서 활동을 시작한 중국계 기사 황염을 2대1로 물리치고 정상 등극의 영광을 차지했다.

98년 말 5회 대회를 끝으로 보해컵 대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뒤 바통을 이어받은 대회가 흥창배였다. 2000년 2월 벌어진 제1회 흥창배 결승전은 루이나이웨이 대 만 14세 소녀 조혜연 간의 싸움으로 펼쳐졌다. 조혜연은 꼬마답지 않게 매서운 공격력으로 대스타 루이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2대1, 아깝게 패권 탈취에는 실패했다. 루이는 이듬해 제2회 흥창배 때는 박지은을 맞아 역시 2대1의 전적으로 무적의 강자임을 재확인했다. 흥창배는 2년간 지속되다가 다시 폐지되는 운명을 맞았다.

흥미로운 것은 루이 9단의 소속국이다. 잘 알려져 있듯 루이 9단은 조국인 중국을 떠나 미국과 일본 등지를 떠돌다가 99년 초 한국에 정착했다. 일본에선 여류들이 그녀의 영입에 반대했고, 미국에선 프로 고수들 간의 ‘진한 승부’가 불가능했던 터여서 한국은 그녀에게 기회의 땅이 됐다. 한국 최고(最古) 전통의 국수전을 제패하는 등 그녀는 남녀 통합타이틀까지 따내며 신화를 계속해 갔다.

하지만 루이가 소속기원을 변경하면서 활약하는 바람에 세계 여류타이틀의 국가별 제패 수 계산은 다소 복잡해졌다. 99년 이전엔 중국, 그 이후엔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기 때문. 4차례의 보해컵, 두 차례의 흥창배는 모두 중국기원 소속으로 따낸 전리품이었다. 한국 간판으로 처음 따낸 우승컵은 2000년 치러졌던 동방항공배. 중국이 주최한 이 대회 역시 딱 한 차례 치르고 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루이는 한국 정착 이후에도 중국 선수로 정관장배에 두 차례나 출전했다. 3회 때부터 이 대회가 단체전으로 전환하면서 ‘국제 단체전의 경우엔 소속기원 아닌 국적 기준으로 출전한다’는 규정이 생겨난 때문이었다. 루이 9단은 3회 정관장배 때는 중국 주장으로 나와 한국의 우승에 찬 물(?)을 끼얹었고, 4회 때는 우승에 기여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중국 멤버로 출전해 무력시위(?)를 펼쳤다. 기구하다면 기구한 ‘여류 최강자’의 운명이었다.

국내 여류 프로 기사 수는 2007년 7월 말 현재 모두 38명. 전체 프로 219명 중 17.4%를 차지한다. 루이 9단, 박지은 8단(제1회 대리배 우승으로 승단함)과 함께 조혜연 7단이 여류 바둑계 정상 트리오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이민진 김혜민을 비롯한 추격자들의 공세도 점점 거세져 가고 있다. 조혜연 7단이 종교적 이유로 인해 사실상 거의 모든 국제 기전에 출전하지 못해온 것은 한국 대표팀 전력(戰力) 차원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바둑은 중국에서 발상해 일본에서 개화했지만 현재 절정기를 누리는 나라는 여전히 한국이다. 여류 바둑 역시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위상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뚜렷하게 처졌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시간 안에 세계를 석권 중인 한국 낭자군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비록 세계 최강자 루이나이웨이로부터 직, 간접적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꾸준한 노력과 연구 분위기 속에서 루이의 그늘로부터도 벗어나는 추세다. 한국 여류들이 잇달아 전해오는 낭보로 올 한해 바둑계 수확도 어느 해 못지않은 풍년이 예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