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통 터지는 일본 바둑 팬들

일본의 인터넷 바둑전문 사이트인 위기(囲棋) 데이터베이스(igo.web.infoseek.co.jp)가 얼마 전 흥미로운 통계를 정리, 발표했다. 이 사이트는 ‘3대 타이틀과 국제 기전의 관계’란 제목으로 일본 메이저 타이틀 보유자들의 국제 무대 활약상을 점검하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바둑의 천국이다. 각종 학생, 여성 단체전 등 아마추어 대회가 수 백 개에 이른다. 프로 공식 기전도 관서기원 주관 몫까지 합하면 수 십 개도 넘을 것이다. 본격 프로 타이틀이라고 할만 한 것은 모두 19개. 이 가운데 최고의 상금과 권위를 누리고 있는 메이저급 타이틀은 3개다. 기성(棋聖)과 명인(名人), 그리고 본인방(本因坊)이 그 것.

3대 타이틀 보유 기사는 국가적인 명사로 대접 받는다. 요즘엔 다소 약화되긴 했어도 과거 이들 바둑계 톱 스타들의 위상은 대단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공식 석상에서 장관들보다 못하지 않은 예우를 받았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물론이고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마저 이들에겐 무한한 경외심을 보여주었다. 수 백 년 간 종주국으로 군림해 온 일본 바둑에 대한 자부심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3대 메이저 타이틀 보유자는 국제 무대에서 훌륭한 성적으로 보답해야 옳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최근 들어 일본인들과 일본 바둑 팬들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죽을 쑤고 있는 것이다. 출전하는 족족 비참할 정도의 몰패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내역을 살펴보자.

다카오(高尾紳路) 9단. 명인과 본인방 양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바둑계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인 그의 국제무대 성적표는 참담할 정도다. 2005년 6월 첫 메이저 타이틀인 본인방을 획득한 이후의 국제 기전 총 전적이 1승 10패(2007년 5월 현재)를 마크 중이다. 그 중엔 6연패 1회, 4연패 1회가 포함돼 있다.

하네(羽根直樹) 9단은 2004년 일본 최고 타이틀인 기성 위를 획득했는데 그 이후부터 각종 국제 기전에서 무려 11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또 야마시타(山下敬吾) 9단은 2003년 기성 획득 이후 한 때 2승 1패를 기록했지만 이후 4연패의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요다(依田紀基) 9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 명인에 오른 이후 국제기전서 5연패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3대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고 국제 무대에 출전하면 부진하다는 징크스로부터 자유로운 기사는 단 1명, 대만 출신의 장쉬 9단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3대 타이틀을 잃으면 국제 기전의 성적이 상당히 회복되는 것이다. 하네 9단의 경우 2006년 기성 타이틀 방어에 실패한 이후 1년 간 국제 대회서 5승 5패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야마시타 9단 역시 기성에서 물러난 2004년 4월 이후 1년 간 4승 6패로 개선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요다 9단도 2004년 말 명인위를 내 놓은 뒤 1년 간 6승 5패란 국제 성적으로 체면을 회복했다.

3대 타이틀 획득과 국제 성적은 완전히 반대로 움직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는 제한 시간의 차이다. 대부분의 국제 대회가 각자 3시간씩 주어지는데 반해, 일본 3대 타이틀은 1인당 8시간씩 제공해 이틀에 걸쳐 바둑 한 판을 마무리한다. 페이스 조절이나 대국 호흡에 있어 양쪽 무대의 조건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두 번째는 상금과 관련돼 있다. 일본 최고 타이틀인 기성의 우승 상금은 4200만엔. 우리 돈 3억 300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명인전(3700만엔)은 2억 9000만원, 본인방전(3200만엔)도 2억 5000만원에 달한다. 이에 반해 국제 타이틀전 우승 상금은 LG배가 2억 5000만원, 삼성화재배는 2억원이다. 4년 주기로 치러지는 잉창치 배의 경우 미화 40만 달러, 우리 돈 3억 7000만원 선이다. 전체적으로 일본 3대 타이틀 상금 규모가 국제 대회 우승 상금보다 많거나 비슷한 규모라는 이야기.

첫 번째와 두 번째 조항을 묶으면 일본 초1류 기사들이 국제 대회라 해서 특별히 더 치중할 이유가 없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프로란 상금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톱 기사쯤 되면 여러 모로 조건이 편한 국내 타이틀전에 더 치중할 수 있다는 뜻. 교통, 숙박, 대국 관습, 체력 관리 등과 관련해 국제 대회는 상대적으로 좀 더 불편하고 익숙치 못하다.

하지만 이것이 성적 부진에 대한 완전한 해명이 될 수 있을까? 일부 참작해 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3시간짜리건, 8시간짜리건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하는 것이 프로다. 한국 프로기사들이 상금이 작다 해서 국내 대회에 소홀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기사들 역시 국내 대회와 국제대회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운다. 요컨대 일본이 톱 기사들조차 국제 교류에서 난조를 보이는 것은 실력 부족이란 얘기다.

3대 타이틀 보유자가 아니더라도 일본 톱 레벨 프로들의 국제무대 성적은 매우 저조하다. 2001년 1월부터 2007년 1월까지 만 6년 간 국제 대회서 10국 이상을 소화한 기사들을 한정해 통계를 뽑아보면 승률 50% 이상 기록 기사 수는 고작 7명에 지나지 않는다. 장쉬와 요다가 각각 34승 27패, 24승 19패로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다. 조치훈은 22승 21패. 다승(多勝) 수로는 3위지만 승률에선 간신히 5할을 넘겼다. 그 뒤로 야마시로(結城聰)가 17승 13패, 고바야시(小林覺)이 6승 4패를 마크 중이다. 고노린(河野臨, 6승6패)과 미무라(三村智保, 5승 5패)는 간신히 ‘반 타작’을 이뤘다.

반면 일본 최고 스타 중 하나인 하네의 국제대회 성적은 22승 33패로 승률이 4할에 지나지 않는다. 야마시타가 18승 22패, 고바야시(小林光一)는 10승 12패에 머물렀다. 왕리청(王立誠,16승27패)이나 왕밍완(王銘琬,14승29패) 같은 경우는 차라리 민망스런 성적표다. ‘살인청부업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연전 타계한 가토(加正夫) 같은 기사조차 국제 대회에 나와선 4승 11패로 망신을 당했었다.


톱 스타들이 각종 국제 대회에서 부진을 거듭할 때마다 일본 바둑 팬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 4월 제20회 후지쓰배서 일본은 8강에 2명을 올려 최근 3년 간 가장 좋은 성적을 작성했다. 그럼에도 팬들은 공식 1인자인 기성(棋聖) 야마시타와, 명인 겸 본인방인 2인자 다카오가 다시 중도 탈락한 데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타이틀을 반납하라” “그게 어렵다면 기성 명인 본인방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승 상금만이라도 반납하라”란 노성(怒聲)이 터져 나온 것. 일본 바둑 팬들이 자국 톱스타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린 역사는 어느덧 10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바둑은 동양권에서 발상해 동양권에서만 성장해왔다고 할 만큼 지역 문화의 성격이 강하다. 일본은 그런 바둑을 세계에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나라다. 현대 바둑의 규칙과 타이틀제도 및 운영 방식은 거의 모두 일본에 의해 주도돼 왔고,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숱한 유망주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선진 바둑 문물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국 중국 대만 바둑이 성장의 기트을 마련했었다. 한 마디로 20세기 후반 일본은 세계 바둑의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일본이 언젠가부터 한국과 중국세에 치여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으니 금석지감을 감출 길 없다. 달도 차면 기우는 이치에나 빗댈 수 있을까. 일본은 2000년대 진입 직전부터 젊은 층의 바둑팬 유입에 실패한데다 많은 대체 오락에 고정 팬들을 빼앗겼다. 그것이 오늘날 국제 무대에서의 순위 저하로 나타난 것이다. 일본 바둑의 몰락은 아무리 융성한 문화라 하더라도 그 뒤를 떠받칠 노력과 정성이 없으면 언제건 허물어질 수 있다는 분명한 교훈을 전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