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배 세계기왕전

2006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그랬듯 바둑계 역시 지난 1년은 변화와 격동의 한 해였다. 12월 중으로 국제 대회로는 제11회 삼성화재배 준결승, 제5회 정관장배 1라운드가, 국내 행사론 한국바둑리그 및 천원전 결승 등이 남아있으나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마무리 됐다.

<국제>

올 한 해 국제 바둑계의 특징은 한국과 중국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주도권을 다툰 1년이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독주 시대가 끝나고 중국세가 두드러지게 도약하는 과정이었다. 한 때는 이미 역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만큼 중국의 기세는 거셌다.

한국은 지난 2000년 8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크고 작은 국제 대회서 23회나 연속 우승하는 무풍지대를 달렸다. 2005년 중국 창하오가 제5회 잉씨배를 제패하고 일본 장쉬가 제9회 LG배를 품에 안으면서 한국의 그 같은 독주 체제는 이미 와해 기미를 드러낸 바 있다. 2006년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지분(持分)’이 좀 더 확실하게 줄어들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한 해였다.

한국 바둑계는 2006년에 들어서자마자 잇단 쇼크에 시달렸다. 새해 초입 ‘불패의 최강자’ 이창호가 제10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중국 뤄시허에게 패권을 내 준 것. 뒤이어 한 중 일 여류 프로 단체전인 제4회 정관장배도 중국 여류들의 품에 안겼다. 다시 2월에 벌어진 농심배 대회 우승팀은 뜻 밖에도 일본. 동양 3국 국가 단체전인 농심배는 전신인 진로배 이후 10여 년 간 한국이 단 한 차례도 우승을 양보하지 않았던 ‘독점 무대’였다. 그 신화를 이끌어왔던 이창호가 단 1승도 보태지 못한 채 우승 컵을 ‘해외 반출’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팬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3월엔 한-중 단체전인 제1회 강원랜드배가 열렸고, 한국은 다시 최종 주자 이창호의 뜻 밖의 패배로 중국의 우승을 쓸쓸히 지켜봐야 했다. 4월에 끝난 제10회 LG배는 구리와 천야오예 등 두 중국 기사가 남의 ‘안방’에서 결승전을 펼쳤다. 5월 일본서 열린 또 하나의 국가대항전 CSK배 우승 팀 역시 중국. 상반기의 흐름만 보아선 국제 무대 주도권은 이미 완전히 중국으로 넘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기사들도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7월 3일 일본서 끝난 제19회 후지쓰배 결승서 박정상이 중국 저우허양을 일축, 자신의 첫 세계 제패와 함께 한국의 금년 첫 메이저 패권을 이뤄낸 것. 중국은 8월 왕시가 마이너급 속기(速棋) 대회인 제18회 TV아시아 대회를 다시 챙겨갔으나 더 이상의 독주는 없었다. 한국의 강력한 태클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가을 이후 한국과 중국의 세력 다툼은 막상막하의 싸움으로 변했다. 내년 초 우승자를 가릴 제11회 LG배는 8강전까지 치른 결과 한국 2, 중국 1, 대만 1명이 4강을 형성했고, 12월 중 준결승을 앞둔 제11회 삼성화재배에선 한국 3, 중국 1명의 4강 구도가 만들어졌다. 올해 준결승까지 마친 제6회 춘란배는 내년 초 창하오 대 구리 등 중국 기사들 간의 쟁패(爭覇)로 이어질 예정. 역시 내년 초 열릴 제3회 도요타덴소배는 한국 이세돌 대 일본 장쉬 간의 결승전만을 남기고 있다.

제8회 농심배는 금년 한 해 한-중 양국의 숨바꼭질(?)의 재판(再版)을 보는 듯 했다. 중국이 21세 청년 펑첸의 신들린 듯 한 5연승으로 대회를 압도하는 동안 한국은 줄줄이 연패, 대회가 싱겁게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1월 하순 한국은 박영훈의 3연승으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2, 중국 2, 일본 1명이 남은 올해 농심배는 2007년 2월 중국 상하이에서 속개돼 우승국을 가리게 된다.

<국내>

금년 한 해 국내 최정상급 기사들의 개인 성적표를 살펴보면 이세돌 ‘상한가’, 이창호는 ‘강 보합’ 정도로 정리된다. 이세돌은 올해 국내 무대에서 물가정보배, 바둑왕전, GS칼텍스배를 연달아 석권해 제한 기전인 맥심배를 포함 4관왕으로 올라섰다. 국제 타이틀인 도요타덴소배를 포함하면 5관왕이다. 이세돌은 또 천원전에서도 결승을 치르고 있어 6관왕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창호는 예년과 비교하면 부진한 게 사실이지만 사실 자기 몫은 다 했다. 국수, 전자랜드배와 왕위, 십단전 우승으로 현역 4관왕. 국제 대회인 춘란배는 차기 우승자가 결정되기 전 까지는 아직 이창호 소유로 봐야 하는데, 이 계산법으론 이창호 역시 5관왕이다. 2005년에 비해 점유율은 다소 낮아진 반면 타이틀 수는 오히려 한 개가 늘었다.

국제 무대 제패(후지쓰배 우승)의 감격을 누린 박정상은 국내에서도 크게 빛났다. 신예연승최강전서 정상을 밟았고 전자랜드배에서도 결승에 진출하는 등 도약의 한 해를 보냈다. 박영훈은 기성위를 방어하고 바둑리그에서 무패의 전적 속에 팀을 우승시켰으며, 후반기엔 농심배 영웅으로 떠올라 역시 흔들림 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국내 ‘4천왕’의 일원인 최철한은 올 들어 국수와 GS칼텍스배를 모두 빼앗기는 불운 속에 국내 무관으로 전락했다.

조한승은 국제 대회인 LG배 준결 진출 외에도 천원전 결승 진출, 연말 마스터즈 배 토너먼트 우승 등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신인왕에 오른 허영호, 삼성화재배 4강을 밟는 동시에 신예10걸전 챔프로 등극한 백홍석, LG배 4강에 깜짝 진입한 홍민표 등은 올해 빛을 본 새내기 스타들. 원성진도 연말 마스터즈 서바이벌 대회 제패로 생애 첫 우승의 감격을 맛 봤고, 고근태는 비록 천원 타이틀 수호에는 실패했지만 중국 1인자 구리를 한-중 천원전서 일축해 갈채를 받았다. 이 밖에 국수전 도전권을 쟁취한 19세 소년 윤준상, 왕위전과 신예10걸전 준우승의 이영구도 주목을 모은 신예들. 여류 부문에선 루이나이웨이가 여류 국수 및 명인을 방어하고 신설된 여류 기성전까지 3개 기전을 싹쓸이, 부동의 최강자임을 재 입증했다.

<기타>

바둑계는 조남철 9단과 임선근 9단을 올해 딴 세상으로 보냈다. 7월 타계한 조 9단은 한국 바둑의 오늘을 가능케 한 개척자였고, 3월 영면한 임 9단은 국내 바둑 행정을 총괄하던 현직 한국기원 사무총장이었다는 점에서 바둑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경사도 있었다. 이세돌 9단은 3월 23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해 딸을 얻었다. 이세돌은 생활이 안정된 덕인지 각종 기전에서 맹활약해 화제를 몰고 왔다.

3월 전북 부안에서 바둑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5월엔 바둑의 대한체육회 준 가맹단체 진입이 확정됐다. 10월 전주시에서 벌어진 제1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도 국내외의 시선 속에 풍성한 잔치로 끝났다. 모두 바둑계의 발전을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이제 얼마 후 2007년 새해로 넘어가면 4일부터 도요타덴소배 결승을 신호탄으로 제5회 정관장배 2라운드, 11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이 벌어진다. 또 2월엔 11회 LG배 준결승과 농심배 최종 라운드가 이어지는 등 숨돌릴 틈도 없는 빅 매치 퍼레이드가 예약돼 있다. 또 어떤 새 스타들이 출현해 얼마나 흥미로운 판도를 형성할지, 국가별 주도권은 어느 나라에서 장악할지 다가오는 새 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