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기 국수전이 한창 종반의 열기를 내뿜고 있다. 국수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바둑 타이틀전 이름이다. 1956년 출범했으니 올해로 꼭 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한다. 국수전보다 3, 4년 뒤 태어났던 패왕전, 최고위전 등은 IMF 사태의 여파로 몇 년째 중단 상태이고 명인전 국기전 대왕전도 사실 상 문을 닫았다. 각종 타이틀전이 명멸하는 가운데 오직 국수전만이 한 해도 거르지 않은 채 의연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바둑의 1인자를 가리켜 한국과 중국은 국수(國手), 일본은 명인(名人)이라고 칭했다. 국수전이 초창기 8기까지 ‘국수 1위전’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바둑계에 군림하던 강자들에 대한 호칭이 ‘국수’여서, 이 대회 우승자에게만 국수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승자는 국수급 강자들 가운데서도 1위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칙 운영은 1964년 제9기 대회부터 ‘국수전’으로 바뀌며 제 자리를 찾았다.

한국 신문에 기보(棋譜)가 등장한 것이 국수전이 처음은 아니었다. 1914년 매일신보에 처음으로 바둑 그림이 실렸고, 1936년엔 같은 신문에 전조선 선수권대회 기보가 관전기와 함께 게재됐다. 그러나 공식 타이틀로 닻을 올리고 지속적으로 기보를 게재하기 시작한 첫 무대는 국수전이었다. 1954년 한국기원이 발족하고, 이듬해 첫 입단대회가 열린 뒤 다시 이듬해 최초의 타이틀전 국수전이 스타트한 것이다.

국수전의 출범은 다른 신문들을 자극하는 효과를 낳았고 이것이 바둑계의 발전을 촉발했다. 경쟁지들은 타이틀전 창설로도 모자라 국제 전보 및 전화 바둑, 일본 유명 기사 초청 대국, 천재 소년 발굴 기념 대국 등 다채로운 이벤트로 붐 조성에 동참했다. 국내 신문들의 이 같은 의욕은 바둑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바둑 붐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최강의 바둑 국가로 위명을 떨치게 된 뿌리는 국수전 창설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국수전이 확고한 권위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이 대회 우승자는 곧 당대 한국 바둑의 1인자를 의미하게 됐다. 국수전의 역대 우승자 계보와 한국 1인자 계보가 완벽하게 일치해 온 것이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초창기 부동의 스타였던 조남철이 초기 국수전을 9연패(連覇)했다. 그 뒤를 이어받은 기사가 김인. 일본 유학을 다녀온 23세 청년 김인은 조남철의 10연패를 저지하며 최강자의 자리를 계승했다. 조남철 아성 붕괴 사건은 당시 국수전 주최사인 동아일보 1면과 사회면을 화려하게 장식할 만큼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국수위는 김인의 6기 연패(連覇)를 거쳐 70년대 윤기현 하찬석 등 또 다른 일본 유학파 기사들에게로 옮겨갔다. 20기째인 1976년엔 역시 일본서 수업한 조훈현이 처음 국수에 올라 바톤을 이어받는다. 조훈현은 이를 기점으로 역대 국수전서 10연패(連覇) 포함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총 16회나 우승, 그가 한국 바둑계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서봉수가 최초의 순수 국내파 국수에 오른 시기가 1986년 30기 때였다는 것도 시사적이다. 이 시기는 한국이 일본 그늘을 완벽히 벗어나 독자적 파워를 내뿜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1999년 43기 때 중국 출신의 루이나이웨이가 최초의 여성, 최초의 외국인 기록을 세우며 국수위를 거머쥔 사건도 세계 바둑계에 유례가 없는 특기할 만 한 사건이었다.

국수위가 이창호에게 처음으로 넘어간 해는 1990년. 이후 이창호는 국수위를 놓고 스승 조훈현과 쫓고 쫓기는 각축을 펼치다가, 최근엔 최철한 등 20대 초반 강자들과 처절한 찬탈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창호는 역대 국수전서 총 9회 우승을 기록 중이다. 반세기의 기나긴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전이 그 동안 단 9명의 손아귀 안에서만 움직였다는 사실이 이 기전의 완강한 권위를 대변해주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수전은 운영 규모 변화에서도 큰 변화를 보여왔다. 출범 때 불과 10여명의 ‘국수’들로만 스타트했던 국수전은 50년 째를 맞는 올해엔 179명이 참가하는 매머드 행사로 컸다. 우승 상금 역시 제1기 때의 3만환(3천원)에서 오늘날의 4천 만원까지 1만 배 이상 확대됐다. 대회 운영방식은 예선에 이은 본선 리그와 도전기, 패자부활전이 가미된 8강 토너와 도전기 등을 거쳐 올해부터는 예선과 16강 토너 및 도전기 형태로 바뀌었다. 도전기 역시 7번기에서 3번기를 거쳐 6기 때부터 5번기로 정착됐다.

국수전과 조남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전자가 역사와 전통, 권위로 압축된다면 후자는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바둑계를 거의 혼자 힘으로 개간하고 개척한 바둑의 대명사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1943년 도일 유학서 돌아온 조남철은 일찌감치 기전과 기보의 중요성을 인식, 국수전 창설에 온 몸을 던져 마침내 뜻을 이뤘다. 또 대회가 출범한 뒤에도 기전의 양적(量的) 팽창과 발전에 전력을 쏟아 기사들의 복지 증진에 진력했다. 국수전 주최사인 동아일보는 지난 여름 조남철 9단이 타계했을 때 한국 바둑계를 향한 그의 이 같은 공헌을 기리는 뜻에서 ‘대국수’ 호칭을 헌정했다.

국수전의 역사를 외국과 비교하면 어떨까. 바둑의 타이틀전은 근대 바둑의 기틀을 완성했던 일본에 의해 시작됐다. 일본은 수 백 년 간 국록(國祿)을 주어가며 육성했을 만큼 바둑에 열성적이었던 나라다. 그러나 그 일본의 현존 최고(最古) 타이틀인 본인방전도 국수전보다 10년 남짓 빠른 61년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방전 외에 왕좌전(53기), NHK배(53기) 정도만이 한국 국수전보다 오래됐다. 일본 최대 규모 기전인 기성전은 30기에 불과하고, 명인전도 신, 구 기전을 합해봐야 44기로 국수전보다 짧다. 중국 최고(最古) 기전인 전국개인전은 국수전 이듬해인 1957년 창설됐으나 이후 많은 공백기를 거쳤다. 중국의 나머지 타이틀전 중에선 20기를 넘긴 기전을 찾기 어렵다.


국수전 반세기 째 왕관을 다툴 이번 50기 경쟁 무대는 한창 막판 열기에 휩싸여있다. 21세의 박영훈과 19세 소년 윤준상이 도전자 결정 3번기를 펼치는 중이고, 그 승자가 타이틀 보유자 이창호를 상대로 5번 승부를 갖게 된다. 이창호가 우승할 경우 2연패(連覇)에 통산 10회 우승이다. 스승 조훈현 이후 첫 두 자리 수 우승자로 올라서는 셈. 박영훈이 국수에 오를 경우엔 국내 최연소, 최단 코스 9단 기록 보유자란 명함에 또 하나의 훈장을 추가하게 된다. 만약 윤준상이 정상을 밟는다면 이창호 최철한에 이어 10대 나이에 국수에 오른 통산 3번째 기사로 탄생한다. 윤준상이건 박영훈이건, 도전자가 현역 국수 이창호를 꺾고 우승할 경우 역대 국수 등정 기사 숫자는 처음으로 10명의 벽을 돌파하게 될 것이다.

가시밭 길을 뚫고 갓 프로에 임관된 10대 소년들의 포부를 물으면 요즘에도 상당수가 “국수에 오르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국수전은 최고(最高) 상금 대회가 아니다. 그런데도 최고(最古) 타이틀 국수전은 우리 바둑인들에게 가장 선망하는 표적(標的)으로 깊숙이 자리잡았다. 한국 바둑의 ‘대표 브랜드’가 바로 국수전이란 얘기다. 지난 반세기의 고난과 영광을 밑거름 삼아 국수전이 앞으로 100주년을 맞는 날까지 더욱 활기차게 달려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