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 트리오’란 최철한 원성진 박영훈 등 3명을 지칭하는 바둑계 조어(造語)다. 공동 애칭이라 해도 좋다. 85년 생 동갑으로 모두 소 띠인 이들 셋은 어린 시절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다. 이들은 조-서 시대에서 이창호 유창혁 조훈현 서봉수의 ‘4천왕’ 시대를 지나 2000년대 초 새 판도가 형성될 즈음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그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신예 집단’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나이가 고작 10대 중반의 소년들이었고, 그들 앞에는 뛰어난 강자들이 태산같은 무게로 가로막아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6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은 국가대표로, 타이틀 홀더로, 심지어는 국제 무대를 평정한 정복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 과정은 이들 3명의 상호 견제와 경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서로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는 뜻이다.

셋 중 가장 먼저 한국기원에 입성(入城)한 소년은 원성진이었다. 다섯 살 때 바둑 돌을 처음 쥔 원성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등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영훈이 연구생에 들어왔다. 같은 시기 최철한은 권갑룡 도장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95년 가을이 되자 박영훈은 연구생 생활 2년 반을 청산하고 스스로 장외(場外)로 향했다.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최적의 지름길이 연구생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어서 그것은 의외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대만큼 빨리 오르지 못하는데 대한 극약처방인 동시에, 온실 같은 연구생 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기도 했다.

박영훈은 그 때부터 바둑광인 아빠의 손에 이끌려 전국 아마추어 무대를 돌았다. 실전 강자들과의 직접 스파링을 통해 힘을 키운다는 목표엔 부합했으나, 열 살이 조금 넘은 소년의 몸으론 감당하기 힘든 고행의 길이었다. 박영훈이 새벽에 끝나는 지방 아마대회를 돌며 ‘소년 장사’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무렵 최철한이 한국기원 연구생에 합류했다. 연구생이던 원성진도 권갑룡 도장에 합류하면서 최철한과 더욱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프로 입단은 최철한이 가장 빨랐다. 97년 5월. 만 12세 2개월로 당시로선 역대 최연소 4위의 빠른 기록이었다. 꼭 1년 뒤 원성진도 프로의 코를 뀄다. 박영훈은 전국 대회 최연소 기록을 경신하는 등 무려 7회나 우승을 거머쥐었으나 프로의 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프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원성진이었다. 99년 제3기 신예10걸전서 그는 즐비한 맹장들의 숲을 뚫고 결승까지 진격했다. 그해 연말 마침내 박영훈이 입단했다. 원성진은 프로 2단, 최철한은 3단일 무렵이었다. 최철한은 2000년 초 제2회 농심배 대표 선수로 나가 파죽의 3연승을 거뒀다.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2001년. 4단이 된 최철한이 다시 농심배에 출전, 2승을 보탰다. 원성진도 질세라 제11기 신인왕전서 다시 결승까지 쳐 올라가 준우승을 기록하는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그 해 연말 진짜 놀랄 일이 터졌다. 2단에 불과하던 박영훈이 정상의 일각을 정복한 것이다. 제6기 천원전으로 결승 상대는 10세 위의 윤성현이었다. 당시 박영훈의 나이 16세 8개월. 성인 타이틀만 따지면 최연소 우승 부문 2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었다.

2002년엔 최철한이 KT배에서 준우승을 따냈다. 박영훈은 중국 천원 황이중과의 대결서도 승리해 통합 천원에 올랐고, 원성진도 그 해 승률 4위, 연승 2위란 눈부신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2003년이 되자 박영훈은 제8회 삼성화재배 결승까지 올라 우승을 눈앞에 두었다가 막판 실착을 범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18세 소년의 국제 무대 준우승은 대단한 쾌거였다. 원성진 역시 국제 대회인 LG배서 4강, 농심배 3연승으로 조직(?)의 명예를 드높였다.

당시 가장 부진하던 최철한은 그 해 연말 반전의 기회를 잡는다. 천원전 결승서 원성진과 최초의 ‘타이틀 격돌’을 벌여 3대1로 역전승한 것. 사기 충천한 최철한은 2004년 국수와 기성 양대 타이틀을 이창호에게서 탈취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박영훈은 그 해 후지쓰배를 제패했다. 송아지 멤버가 마침내 세계 꼭대기마저 정복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2005년 잉창치배와 후지쓰배 준우승에 머물던 최철한은 대만 주최 중환배로 기어이 세계 챔프 명단에 합류했다. 이상이 지금까지 ‘송아지 트리오’가 보여준 활약상이다.

기전 성적을 단위에 연동하기 시작하면서 입단이 가장 늦었던 박영훈은 최연소 신기록을 세우며 셋 중 가장 빨리 9단에 올랐다. 최철한도 9단에 올랐고 원성진의 현재 단위는 7단. 2006년 9월 현재 국내 랭킹은 최철한 3위, 박영훈 4위, 원성진은 10위에 각각 포진했다. 현 시점에서만 본다면 원성진이 초반의 강세가 꺾이면서 상대적으로 한 발 뒤져있는 셈이다.

그러나 최근 원성진은 200여 국내 기사들 중 승률 1위를 달리며 각종 무대에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제50기 국수전에선 난적 이세돌을 제치고 도전자 결정 토너 준결에 올라 있다. 준결 상대가 박영훈이란 점이 또 흥미롭다. 둘 간의 맞대결은 무려 3년 여 만이다. 셋은 또 올해 농심배에서 나란히 한국대표로 뽑혀 화제가 됐었다. 대회 초반 2번 주자로 출전한 최철한이 뜻 밖에도 조기 탈락함으로써 이제는 박영훈, 원성진 등 두 ‘송아지’가 올해 한국 우승의 열쇠를 쥔 상황. 역대 농심배는 최철이 그랬듯 박영훈 원성진으로서도 ‘출세’를 촉진한 영광의 무대였다.

이들 셋 간의 상호 대결이 생각보다 뜸했던 것은 좀 의외다. 각자의 바둑계 비중이 갈 수록 높아져 가면서 중요 무대에서의 격돌 기회도 더 많아질 전망. 지금까지 3각 대결 성적에선 원성진이 최철한을 상대로 7승 5패, 박영훈을 상대로 3승 2패를 기록해 가장 앞서있다. 박영훈 대 최철한은 박영훈이 10승 9패로 간발의 차로 우위를 기록 중이다. 이 중엔 2005년 제16기 기성전 결승(박영훈 3대2승)이 포함돼 있다.

송아지 트리오의 존재는 21세기 초입 한국 바둑이 세계를 호령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맡았다. 그들 간의 경쟁 속에 숱한 기록과 화제가 양산되면서 바둑계를 풍요롭게 했다. 다른 기사들에겐 자극제 역할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우정과 대결은 이제 고작 한 두 라운드를 끝냈을 뿐이다. 앞으로도 국내외 각종 타이틀 무대에서 이들은 서로 각축하고 서로 도우며 한국 바둑의 새로운 주역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