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하순 벌어졌던 제10회 한-중 천원전은 고근태 5단이 구리(古力) 9단을 2대1로 꺾음으로써 한국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한-중 천원전은 양국 천원 타이틀 보유자끼리 맞서는 일종의 이벤트 기전인데다 우승 상금도 1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번 결승 결과가 주목을 끈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고근태 5단은 이번 3번 승부 첫 판에서 구리 9단에게 거의 완패에 가까운 내용으로 무너졌다. 관계자 모두로부터 ‘역 불급’이란 진단이 나오던 상황에서 2연승을 거두며 역전 우승했으니 팬들이 환호할 만 했다. 게다가 한국은 올해 들어 벌어진 각종 국제 대회에서 번번이 중국세에 패해 몰리던 상황이었다. 박정상 9단이 패권을 차지한 후지쓰배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국제 타이틀을 중국이 가져갔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한-중 천원전 결과에 갈채를 보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똑같이 양국 동명(同名) 타이틀 보유자라곤 하지만 그 격(格)에서 고근태는 아직 구리의 맞상대가 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리는 최근 수 년 째 중국의 명실상부한 톱 랭커이다. 보유 중인 자국 내 타이틀도 천원 외에 명인 NEC배 아함동산배 등 무려 4개나 된다. 이에 비해 고근태의 8월 국내 랭킹은 10위. 가지고 있는 타이틀도 물론 천원 1개뿐이다.

고근태의 올해 나이는 19세, 구리는 23세. 둘이 바둑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4살이란 나이 차보다 훨씬 크다. 결국 고근태의 구리 격파는 한국의 신예가 중국의 최강자를 눌렀다는 의미를 지니며, 이는 한창 기세등등한 중국 바둑을 제지할 한국의 2선 신예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 됐다.

구리는 현역 세계타이틀 보유자이기도 하다. 지난 봄 폐막된 제10회 LG배 세계기왕전서 그는 뭇 열강들을 잇달아 베고 당당히 정상을 밟았었다. 힘이 좋고 수읽기가 뛰어난데다 임기응변에도 능한 그가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온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김영삼 7단 같은 기사는 구리를 이창호 이세돌과 함께 묶어 ‘세계 최강의 현역 3강’으로 꼽고 있고, 많은 기사들이 이런 견해에 수긍하고 있다.

구리는 또 ‘한국 킬러’로도 유명하다. 특히 한-중 천원전, 한-중 신인왕전 등 비교적 소규모의 양국 간 3번기 대결에선 예외 없이 승리를 해 왔다. 한-중 천원전만 하더라도 그는 2003년 제7회 대회 때 한국 송태곤 5단(당시 단위)을 2대0, 이듬해 8회 때는 최철한 8단을 2대1로 눌렀고 작년 9회 때 최철한을 다시 만나 또 한 번 2대1로 승리했었다. 그는 올해 이 대회 4연패(連覇)에 도전했던 셈인데, 최약체 상대(?)로 꼽혔던 고근태에게 뜻 밖에도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구리는 한-중 신인왕끼리 맞붙는 정기전서도 2001년 4회 대회 때 조한승 4단을 2대1로 제쳤고, 2005년 제8회 때는 박영훈 9단을 만나 역시 2대1로 이겼다. 동년배 한국 젊은 스타들과 맞대결한 이 2개 대회 5차례 대결을 모조리 승리로 장식했다는 결론이다. 구리의 국제 대회 3번 승부 승률은 이처럼 막강하다. 그가 국제 3번기서 패한 것은 제9회 삼성화재배 준결승 때 이세돌에게 1대2로 제압당한 것이 유일하다.

세계 최정상급 스타들을 추격하는 신예 유망주 그룹을 비교할 때 중국이 한국을 한 발 앞섰다는 느낌을 받은 데는 구리의 죄(?)가 컸던 셈이다. 하지만 구리는 이미 기성 세계 최강자 그룹에 편입된 상태다. 구리보다는 천야오예(陳耀燁) 같은 주니어들의 활약이 더욱 무섭다. 만 17세에 불과한 천야오예는 10회 LG배서 이창호와 박정상 등을 연파하고 결승까지 내닫는 깜짝 쇼를 펼쳤으며, 11회째를 맞는 올해 LG배서도 가볍게 8강에 안착해있다. 천야오예가 이처럼 맹활약하는 사이 그에 비견할 만 한 전과를 올린 한국 신예는 보이지 않았다.

고근태 5단은 최근 일본서 개막된 제3회 도요타덴소배에서도 중국 스타 중 1명인 뤄시허(羅洗河)에게 극적인 역전 반 집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1주일 전 한-중 천원전서 구리에게 역전승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는 증거다. 뤄시허는 금년 초 제10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이창호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던 기사. 올해 세계 챔프에 오른 2명의 중국 기사를 연속 꺾은 고근태야 말로 금년 우리 바둑계 최고의 루키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고근태의 맹활약은 같은 또래 유망주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 고근태는 지난 해 제10기 천원전 우승자 자격으로 올해 많은 국제 대회에 한국대표로 나가는 혜택을 누렸는데, 현재 진행 중인 11기 천원전에선 아깝게도 중도 탈락한 상태다. 다른 국내 기전을 제패하지 못한다면 내년엔 국제대회 출전 풀시드를 받을 수 없다는 뜻. 이 말은 고근태 만큼 활약할 수 있는 신예 유망주가 꽤 여럿이란 얘기도 된다. 실제로 고근태는 윤준상 이영구 강동윤 허영호 홍성지 등 같은 또래의 라이벌들과 승패를 주고받으며 난형난제의 접전을 펼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최근 종료된 제11회 삼성화재배 통합 예선에선 놀랄 만 한 일이 벌어졌다. 아직 이름도 생소한 ‘진짜 신참’ 소년들이 중국 기성 강호들을 따돌리고 일약 본선 무대에 나선 것이다. 통합 예선 결승서 18세의 김형우 초단은 중국의 왕시(王檄) 9단을 일축, 대망의 국제무대 진입에 성공했다. 왕시라면 바로 전주(前週) 이창호를 결승서 따돌리며 TV아시아선수권을 품에 안았던 바로 그 기사다. 또 19세의 배준희 초단은 목진석 9단에 이어 중국 랭킹 2위의 막강 스타 쿵제(孔杰)마저 무너뜨리며 역시 본선 무대를 밟았다.

김형우는 2005년 8월 입단했고 배준희는 11월 프로가 됐다. 둘 모두 전문기사 완장을 찬지 1년도 안 돼 세계 톱스타들의 경연장에 합류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강동윤 윤준상 같은 10대 유망주들이 본선에 안착, 17세의 장웨이(張維) 4단 정도가 눈길을 끄는 데 그친 중국을 압도했다.

세계 바둑계는 일본이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몇 년 전부터는 한국과 중국의 각축장으로 좁혀져가고 있다. 주축 연령층도 이창호만 30대일 뿐 한국의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박정상, 그리고 중국은 구리(古力) 쿵제(孔杰) 천야오예(陳耀燁) 후야오위(胡耀宇) 등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멤버들이 양국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당분간은 이들의 승부가 초점이지만, 그 뒤를 이을 새 얼굴의 질과 양이야말로 관심을 끈다. 기존 스타들과 비교해 나이는 비슷하거나 몇 살 아래, 그리고 지금까지는 검증이 덜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찬란히 빛을 발할 ‘원석’들의 출현 여부가 향후 세계 판도를 좌우하리란 뜻이다.

지난 1년 여 동안 이 점에서 다소 어두운 전망이 나오던 한국이 다시 반격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 같아 매우 반갑다. 조훈현 9단은 “현재로선 시장성과 저변에서 중국의 여건이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 젊은 기사들도 튼튼한 허리를 형성하고 있어 양국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백중전을 펼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향후 한국 바둑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느냐 여부는 ‘부화(孵化)’를 앞둔 젊은 ‘병아리 기사’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