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둑계 화제 중의 하나는 박정상 9단의 연속 반집 패 사건이었다. 7월 초 제19회 후지쓰배서 당당히 우승한 박정상은 귀국 직후부터 연속 세 차례 반집 패를 당했다. KBS 바둑왕전서 고근태에게, 바둑리그에서 이영구에게 딱 반 집 차로 지더니 GS칼텍스배에선 이세돌에게 또 다시 반 집을 패했다. 불과 1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3연패 직후인 7월 19일 박정상은 농심배 예선 4회전서 김동희 2단을 눌러 이겼다. 드디어 연속 반집 패의 악몽에서 벗어났구나 하는 순간, 이틀 뒤 벌어진 같은 대회 예선 준결승서 진동규 3단에 패해 탈락했다. 결과는 또 다시 반 집. 후지쓰 배 출격 직전인 6월 26일 제3회 전자랜드배 결승 1국서 이창호에게 당했던 것까지 계산하면 26일 사이 무려 5번이나 거듭된 반집 패 악몽이었다.

바둑이란 게임은 집(戶) 수효로 승부를 가리며 그 최소 단위는 한 집이다. 반 집이란 애당초 바둑판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 집이란 무승부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인위적 장치다. 또한 반집은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가장 최소한의 승부 차이이기도 하다. 반 집 승부는 그만큼 치열하다. 7, 8년 전까지만 해도 “반집 승부는 운, 1집 이상 승부는 실력 차”라고 했다가 요즘엔 “반집도 실력의 소치”라고들 한다. 현대의 기사들이 워낙 뛰어난 계산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나온 얘기인데, 그렇더라도 여전히 반 집을 이기면 행운이고 패하면 불운으로 간주된다. 하물며 한 달도 안 되는 동안 무려 5회나 반 집을 졌다면 엄청난 악운이라 할 만 하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박정상이 이번에 기록한 3연속 반집 패만 해도 신기록이라고 한다. 다만 여기엔 ‘본선 대국 이상만 계산할 경우’란 단서가 따른다. 예선 대국 기보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게 한국기원의 관례여서, 예선까지 포함할 경우 3연속 이상의 반집 패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설명. 어떻든 박정상의 이번 연속 반집 패가 확률상 얼마나 나오기 힘든 불운 시리즈였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반집을 둘러싼 화제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당연히 희비 쌍곡선이다. 이긴 쪽은 천국이요, 패한 쪽은 지옥일 수 밖에 없다. 올 해 초 한국과 중국 바둑리그 우승 팀인 신성건설 대 상하이 이동통신 팀 간의 ‘한-중 챔피언스 리그’ 때도 그랬다. 베이징서 벌어진 이 대결은 양 팀 4명씩 맞대결, 승수가 많은 팀이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초반 1대2로 밀린 상황에서 이희성이 등장, 후야오위(胡耀宇)와 8시간이 넘는 대접전 끝에 극적 반집 승을 일궈냈다. 승부를 가리기 위해 ‘연장전’이 불가피했다. 등장한 기사는 한국 박영훈과 중국 창하오(常昊). 박영훈은 초반 불리했으나 끈덕진 추격 끝에 극적으로 반집 뒤집기 승을 거두었다. 막판 잇달아 터진 극적 2연속 반집 승. 덩달아 한국 팀도 역전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2005년 연말엔 타이틀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결승 무대에서 2번 연속 반집 승부가 연출돼 팬들을 열광시켰다. 고근태 3단(당시)이 박정근 초단에게 1국서 흑으로 반 집을 남기더니, 뒤이은 2국서 백으로 다시 반 집을 이긴 것이다. 둘 간의 결승 5번기는 이후 더 이상 반 집 승부는 나오지 않았고, 우승은 3승 1패를 기록한 고근태에게 돌아갔다.

일본에선 좀 더 극적인 기록이 있다. 지난 2000년 한국 출신의 류시훈 7단(당시)이 일본 천원위 보유자였던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에게 도전했을 때의 일. 류 7단은 3대0으로 완승해 우승했는데, 그 세 판이 모조리 반집 승이었다. 이긴 집 차를 모두 합해 봐야 1집 반, 우승 상금은 1400만 엔이었으니 1집 당 1000만 엔에 육박하는 짜릿한 승부였다.

박승현 5단도 반집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경기(驚氣)를 일으킬 만 한 기사. 그는 지난 봄 세계 최고의 국제 기전인 제11회 LG배 통합 예선서 막판 두 판 연속 반 집을 이기고 대망의 본선에 발을 디뎠다. 그는 “뭔가 행운이 따른다”는 예감 속에 본선에 나갔으나, 1회전서 엎치락뒤치락 끝에 일본 고노린(河野臨)에게 통한의 반집 패를 당하고 대진표에서 사라져버렸다.

세계 바둑 사상 ‘최고액의 반집’ 승부는 1978년 제2기 일본 기성전 도전기 때 탄생했다. 후지사와(藤澤秀行) 기성에 대한 가토(加正夫) 9단의 도전으로 6국까지 3대3. 마지막 7국도 그야말로 ‘눈 터지게’ 미세하게 진행됐다. 검토하던 동료 기사들이 “1집을 1천 만엔 쯤으로 살 수 있다면 두 기사 모두 선뜻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농담을 나눌 정도였다. 결과는 후지사와의 반집 승. 결국 4200만 엔이란 거액의 우승 상금이 따라왔으니 ‘1집 1천만 엔’은 턱도 없는 비유였다. 준우승 상금 1200만 엔과는 3000만 엔의 격차. 그 바둑의 반 집은 당시 환율로 우리 돈 3억원에 상당하는 거액이었다.

반집 차로 잘 이기는 기사로는 이창호 9단, 안조영 9단, 박영훈 9단 등이 손꼽힌다. 모두가 계산과 끝내기에 장기를 가진 것으로 평가 받는 기사들이다. 기록 상으로도 2000년 이후 본선 이상 대국서 가장 반집 승을 많이 한 기사는 12회를 기록한 이창호로 나와 있다. 박영훈 안조영 등은 9회. 공격적 기풍의 유창혁도 9회로 동률 2위에 올라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러나 이창호라고 해서 반집 승부가 되면 무조건 이긴다고 보면 오산이다. 같은 기간 반집 패 부문 1위는 14회의 조훈현과 유창혁, 그 다음 3위가 10회를 기록한 이창호였다. 이창호가 이 부문 3위에 오른 것은 좀 의외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많이 졌던 바둑을 반집 차까지 추격한 판이 그만큼 많았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 반집 패 부문에선 최철한(9회)과 안조영 박영훈 박정상(이상 각 7회) 등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이창호 안조영 박영훈 등의 기사가 양쪽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일발 KO보다 미세한 ‘계산 바둑’을 추구하는 기풍의 소유자란 해석이 가능하다.

이창호 같은 기사들에게 반집 승리가 많은 이유는 기막힌 끝내기 솜씨를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부류의 기사들은 ‘확실한 반집 승’이 내다보일 경우 무리하지 않고 두터운 마무리로 반집 만을 남기려 한다. 최대한 당기면 두어 집 이길 바둑도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확실하기 때문인데, 물론 컴퓨터처럼 정밀한 계산 능력이 뒷받침 돼야만 가능한 전략이다. 결국 ‘반집 승’이 많은 기사들은 끝내기 솜씨와 계산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반집 승부를 주고받는 당사자 프로 기사들은 피가 마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둑 승부에 있어 반집 승부만큼 극적인 피날레는 없다. 관객의 입장에선 최고의 결말이며 결국 최고의 흥행 효과로 이어진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승부에서 어떤 반집 승이 터져 나와 구경꾼들을 흥분시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