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9단이 제39기 왕위전서 또다시 우승, 타이틀 10연패(連覇)를 달성했다. 7월 15일 벌어진 도전 5번기 제4국에서 옥득진 2단을 누르고 3대1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것. 이 9단은 무명 도전자 옥득진의 겁없는 도전에 부담감을 느낀 듯 첫판을 내주었으나 내리 3연승, 96년 이후 10년째 왕위를 고수했다.

10연패 달성 과정에서 조훈현(4회), 유창혁ㆍ이세돌(각 2회), 서봉수ㆍ옥득진(각 1회)이 희생물이 되었다. 이창호는 10연패가 확정된 뒤 도전자 중 두 차례에 걸쳐 3대2로 간신히 이긴 이세돌 9단과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소감을 말했다.



제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하더라도 같은 기전을 두 차례 연속 우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연패의 횟수가 두 자릿수에 이를 경우 대단한 업적이라 할 만하다. 어떤 게임이든 산술적으로 이길 확률은 2분의 1. 10번을 계속 이기려면 2분의 1의 10승이다. 그 계산은 무려 1000분의 1이 넘는다.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짐작할 만하다.

10대 중반 때부터 한국 바둑계를 좌지우지해온 이창호는 국내 타이틀 두 자릿수 방어를 두 차례 이루었다. 하나는 기성전. 총 11연패를 기록했으며 이 것이 개인적으로 최장 기록이다. 93년 조훈현 9단으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은 뒤 2003년까지 모든 도전자를 분쇄, 난공불락의 성을 쌓은 그는 2004년 도전해온 10년 연하의 최철한에게 마침내 패했다. 그리고 기성전 연패의 역사도 일단 끝이 났다.

따라서 이창호의 연패 신기록 도전은 이제 왕위전으로 옮겨간 셈이 됐다. 한 차례 더 방어해 기성 방어횟수와 타이를 이룬다면 그 뒤부터는 신기록 행진에 들어갈 수 있다. 이 9단은 전통의 국수전에선 5연패를 기록한 바 있다. 국기전(4연패), 최고위전(6연패), 명인전(6연패) 등은 기전이 폐지돼 기록 경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국내 타이틀 최장기 방어 기록은 이창호의 기성 11연패일까? 답은 ‘아니다’ 이다. 이 부문 기록은 조훈현이 가지고 있으며 무대는 패왕전이었다. 조훈현 9단은 1978년 김인 9단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뒤 1993년까지 무려 16년 간을 장기 집권했다. 그의 패왕위 아성을 허문 기사가 연패 경쟁자인 이창호(1994년)였다는 사실도 아이러니컬하다.

조훈현은 이창호가 새로운 패주로 군림하기 전 세 차례나 전관왕에 올랐던 슈퍼스타였다. 당연히 연패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다. 패왕전 외에도 국수전서 10연패를 이뤘고 최고위전서 8년, 국기전 7년, 명인전 6년, 대왕전 5년, 기왕전 4년 연속 우승의 기록을 갖고 있다. 왕위전에선 9연패를 마크, 지난해까지 이창호와 공동 최다 기록을 보유했다가 올해 2위로 밀려났다.

외국의 경우를 보자. 우리보다 기전 역사가 긴 일본에 눈이 번쩍 뜨일 대기록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경쟁자 수 또한 우리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단일 기전 최다 연패 기록은 조치훈 9단이 갖고 있다. 조 9단은 89년부터 98년까지 본인방위를 10연패했다. 일본 바둑의 혼이 서린 본인방전서 한국 출신의 조치훈이 최장 방어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본인방 타이틀은 다카가와(高川格) 9단이 9연패 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가 98년 조치훈에 의해 깨졌다.

대신 조치훈의 라이벌이었던 고바야시(小林光一)가 일본 최고 상금 타이틀인 기성위(棋聖位)를 8연패해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고바야시는 86년부터 93년까지 기성에 머물면서 최고의 기사로 군림했다. 명인전 최장 방어 기록 보유자도 고바야시로 7연패(88～94년)를 기록했다. 이밖에 가토(加藤正夫)의 왕좌 8연패, 후지사와(藤澤秀行)의 기성(棋聖) 6연패, 린하이펑(林海峰)의 천원 5연패, 오다케(大竹英雄)의 기성(碁聖) 6연패 등이 유명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칭위안(吳淸源)이나 사카다(坂田榮男)가 시대적 특성 탓에 이 대열에 끼이지 못한 것도 재미있다.

중국에선 마샤오춘(馬曉春)의 명인 13연패가 대표적인 연승 사례. 마샤오춘 9단은 25세 청년 시절이던 89년 라이벌 류샤오광(劉小光)으로부터 명인위를 탈취, 38세의 중년이 된 2002년 저우허양(周鶴洋)에게 물려주기까지 장장 13년 간 성주로 군림했다. 이 시기가 마샤오춘의 전성기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유독 명인전에 강했다. 일종의 활동 거점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연패를 계속하기 위해선 실력만으론 안된다. 실력 외에도 특별한 연(緣)이 닿아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서봉수 9단은 72년 19세에 2단의 몸으로 명인에 오른 뒤 기라성 같은 선배 강자들을 해마다 무찔러 5연패를 이루었다. 그는 연속 우승 기록이 중단된 뒤에도 유독 명인전에서는 강해 ‘명인전의 사나이’로 불렸다. 조훈현도 명인전에서만은 서봉수를 쉽게 다루지 못했다. 김희중 9단과 기왕전, 고재희 7단과 한국기원 선수권전 같은 것도 비슷한 케이스다.

특별히 한 기전에 총력을 집중해 연패를 이루는 경우도 물론 있다. 일본의 괴물 기사 후지사와(藤澤秀行)와 기성전의 관계가 그렇다. 호주가(好酒家)로 유명한 그는 진득하게 모든 기전에 전력투구할 입장이 못됐다. 그는 그래서 최대 상금의 기성전에 올인했다. 방어전을 앞두고 금주에 들어가 경기가 끝난 뒤 참았던 말술을 마셔대곤 했다. ‘나는 1년에 4승만 하겠다’　던 말도 유명했다. 7번 승부인 기성전에선 4승을 먼저 따내는 기사가 우승하게 되므로, 다른 작은 기전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연패는 꾸준함과 근성, 그리고 투철한 장인정신의 소산이다. 도전자를 연파할 만한 실력은 물론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연패란 고인 물의 다른 표현이어서 사실 신선하지는 않다. 세대 교체와는 대립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예의 화끈한 등장 못지 않게 베테랑들의 완강한 기록 퍼레이드가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감동스럽기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많다.

새로운 주자로 바통을 받은 이창호. 그의 왕위전 연패(連覇) 레이스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혹시 이창호 자신이 다른 기전서 새 기록을 세우거나, 다른 기사가 불쑥 새 연패 주자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을까? 바둑계의 밥상은 그래서 언제나 성찬(盛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