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바둑 시장(市場)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릴 것 없이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며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활동 거점을 옮겨가는 경우도 있고, 결혼과 함께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또, 더 뛰어난 기량을 갖추기 위한 유학도 빈번해졌다. 이들의 활발한 이동을 지켜보면 마치 축구나 야구같은 스포츠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

유경민 5단. 올해 24세의 이 훤칠한 청년은 최근 느닷없이 대만 진출을 선언했다. 오래전부터 해외 활동을 꿈꾸어온 그가 굳이 대만을 택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체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대만은 바둑 신흥국이란 것이다. 수적으로 포화 상태이고 질적으로 답보 상태인 나라를 피해 다양한 꿈을 펼치는 데는 대만이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유5단은 대만기원 객원기사 자격으로 대만기원이 주최하는 모든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바둑의 국적(國籍)이 바뀐 것이다. 대만기원 측도 이 젊은이의 합류를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바둑 선진국 유망주의 등장이 토착 기사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대만 바둑계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한국의 프로와 아마추어 기사들이 빈번히 원정에 나서는 나라여서 유5단은 여러 모로 든든한 현지 지부장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여류 프로 멍샤오위(孟昭玉)은 한국행을 선언했다. 프로 신분이지만 유학 성격이 짙다. 한국이 국제 기전에서 그토록 강세를 보이는 이면에는 남다른 교육 기법이 있다고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2002년 중국 여자명인전 준우승의 관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충실화에 올인 하겠다는 자세야말로 진짜 프로답다. 멍샤오위는 한국 권갑룡 도장에서 일단 2년 동안 수학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6월 하순 서울서 열린 제7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 국내 예선 대진표에는 낯선 이름들이 등장했다. 김병민 7단, 하영일 4단과 김현정 3단. 분명 한국기원 소속 프로들은 아니다. 앞의 두 기사는 일본 관서기원, 김현정은 일본기원 중부 총본부 소속이다. 국가 대항 단체전인 농심배는 올해부터 소속 기원 아닌 국적별로 팀을 구성키로 했고, 그 바람에 재일동포인 이들이 예선에 출전케 된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차승 9단, 송광복 9단 등 북한 국적을 가진 기사들도 일본서 활동 중이라고 한다. 물론 조치훈, 류시훈, 조선진 등 배테랑급 교포 기사들도 있다. 조치훈은 여섯 살 때 도일해 반세기 가깝게 일본서 생활하며 최고의 기사로 발돋움,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였다. 고국 바둑 실력의 비약적 향상도 그의 맹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 조치훈은 한국 바둑이 해외로 진출한 뒤 국내외에서 실리와 자부심을 함께 이끌어낸 대표적 성공사례였다.

여류 기사인 김현정 3단은 94년 일본에 건너가 97년 뒤늦게 입단, 지금까지 그 곳 프로 기사로 활동해 왔다. 한국 여류 김효정 2단의 언니이기도 한 김현정 3단은 올해 일본 기사 나카네(中根直行) 8단과 결혼했다. 외국 프로와 결혼한 기사로는 권효진 4단도 있다. 그녀는 중국의 유망주 위에량(岳亮) 4단과 열애 끝에 지난 4월 화촉을 밝혔다. 그러나 권4단은 일본 기사로 활동 중인 김현정의 경우와 달리 한국기원 소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남편과 함께 큰 규모의 바둑 교실을 운영, 아버지 권갑룡 7단의 가업을 계승하고 있으니 대표적 바둑 코스모폴리탄 중 한 명이다.

한국 아마 강자 중에선 홍맑은샘, 윤춘호, 김상준 등이 일본에 진출해있다. 한국기원 연구생 최상위급인 이들은 운이 따르지 않아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일본서 바둑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홍맑은샘 7단은 작년 일본의 제5회 봉황배서 당당히 우승해 한국 바둑의 매운 맛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바둑계의 국수주의 때문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바둑 강의, 아마 대회 출전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 한 때 일본의 프로 관문을 노크했는데 거절당한 것이다. 실력이 월등한 이들에게 입단 대회 출전을 허용할 경우 새 입단자들이 온통 한국 아마 강자들에 의해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게 일본측의 두려움이었다. 홍맑은샘 7단 등은 한 때 이 문제를 현지 법원에 고소까지 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는데 아직 결론이 안 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바둑인들이 해외에서 영광만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실례이다.

한국이 세계 최정상의 지위를 누리면서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바둑 지망생 숫자도 점차 늘고 있다. 헝가리의 최고수인 다이아나 코스체기 양은 현재 명지대 4년 장학생으로 재학하면서 바둑 공부에 여념이 없다. 2003년 세계 아마선수권대회에 참가하러 내한했다가 3개월 간 단기 유학한 적이 있는 그녀는 한국의 열정을 잊지 못해 금년 초 정식으로 수업을 위해 다시 찾은 것이다.

태국의 최강자 그룹에 속하는 아피뎃 지라소핀 군도 명지대 정원 외 입학생으로 한국의 바둑 학도들 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 역시 처음엔 중국 섭위평 도장으로의 유학을 염두에 두었다가 바둑도 한국이 더 강한데다 학위까지 딸 수 있는 기회여서 명지대를 택했다고 한다. 4년 전엔 프랑스의 피에르 오두와 5단이 한국을 찾아 평촌 기린아 도장에서 한국 바둑의 진수를 접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한국 유학을 와서 프로 자격을 딴 케이스로는 러시아 출신 알렉산드르 디너스타인(애칭 샤샤) 초단과 스베타 초단이 대표적이다. 둘은 97년 3월 한국기원 초청으로 내한해 기량을 연마한 끝에 2002년 6월 추천 입단, 객원 기사로 활동해왔다. 샤샤는 결혼과 함께 2년 전 러시아로 돌아가 바둑 보급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기원 소속 적(籍)은 포기하지 않아 타이틀전에는 출전 자격이 있지만 항공료가 비싸 못 온다는 입장. 이에 반해 스베타는 9년째 한국서 활동 중이다.

바둑의 국경 개념이 사라지면서 각국 간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바둑계에서도 이중국적은 문제가 된다. A국 소속 기사가 B국 국내 타이틀전에도 나간다면 두 나라 모두 국내 타이틀전 질서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최강의 여류로 불려온 한국기원 소속 루이나이웨이가 중국 여류 명인전에 출전했던 것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물론 국제 기전의 경우 이런 걸림돌은 전혀 없다.

바둑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바둑의 발원국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자부심은 여전히 강하다. 중세 이후 바둑을 가장 열성적으로 육성해온 일본은 20세기 말까지 바둑의 종주국으로 행세했다. 하지만 1990년도 이후 세계 최강으로 군림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이 3개국이 자존심과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드넓은 광장에서 함께 만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특히 우수 인력 수출과 수입 양면에서 한국이 중심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최근 모습은 자랑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