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제9회 LG배 세계기왕전이 장쉬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4월 20일 서울 한국기원서 벌어진 결승 3, 4국에서 장쉬 9단은 중국의 위빈 9단을 연파, 3대1의 스코어로 세계 최대 국제기전의 주인공이 됐다.

장쉬는 여러모로 스타성을 갖춘 국제적인 기사다. 1980년 대만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 핏줄이면서도 일본서 활약해왔다. 모국에서 천재 소년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10살 때이던 1990년 도일, 린하이펑(林海峰) 9단 문하로 들어갔다. 14세이던 1994년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장쉬는 곧바로 화려한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내에서 그의 활약상이 얼마나 눈부셨는지는 최근 4년간 연도별 전적이 말해 준다. 2000년 53승 12패, 2001년 52승 24패로 400여 일본 기사들 가운데 다승(多勝) 2위에 올랐고,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70승 14패, 55승 21패란 경이적 전적으로 1위를 마크했다.

이 같은 전적은 당연히 무수한 타이틀 획득으로 열매를 맺었다. 최고(最古) 전통의 본인방을 필두로 명인, 왕좌, NEC배, NHK배 등 크고 작은 타이틀을 두꺼비 파리 잡듯 먹어 치우면서 현재 무려 5관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조치훈이나 고바야시(小林光一)의 전성시대를 오히려 능가할 정도의 엄청난 점유율이다. 2004년 말 최우수 기사(MVP)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고, 지금 추세라면 올 연말의 MVP 또한 그에게 돌아갈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프로의 성적은 또한 수입과 직결된다. 그는 지난해 1억500만엔(약 10억 5000만원)의 상금을 획득해 2년 연속 최고 수입을 기록했다. 2억5000만원의 우승 상금이 걸린 LG배까지 품에 안은 올해는 이를 훨씬 상회할 전망이다. 타이틀 수, 승패, 수입 등 모든 면에서 장쉬는 단연 일본을 대표할만한 얼굴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2004년 초 일본 여류 바둑계의 대표적 스타 중 하나인 고바야시 이즈미(小林泉美) 6단과 결혼, 국제적인 바둑 커플을 이뤘다. 이즈미 6단은 왕년의 최고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의 장녀다. 고이치의 타계한 모친 레이코 6단도 프로 기사였고, 저 유명한 신포석의 주역 기타니(木谷實) 9단의 외손녀다. 장쉬로선 가히 세계 최고의 바둑 가문에 장가를 든 셈이다. 이즈미 6단은 이번 LG배 결승 4국을 앞두고 내한, 하루 종일 검토실을 지키며 낭군의 바둑을 분석한 뒤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장쉬의 이번 LG배 제패는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내리막길을 걷던 일본 바둑에 희망의 빛을 밝혔다는 점을 우선 꼽을만하다. 그동안 국제 바둑시장(市場)은 한국이 전체의 약 7할 정도를 독점해왔고, 일본은 중국에도 뒤져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온 정도였다. 1992년 이후 일본기원 소속 프로가 세계 메이저대회 정상에 선 것은 고작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25세의 세계 제패도 흔치 않은 일. 물론 이창호의 16세, 이세돌과 박영훈의 19세 보다는 늦었지만 일본 기사로는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세계 정상을 밟았다. 게다가 처음 결승에 진출한 기사는 우승할 수 없다는 바둑계의 오랜 징크스를 장쉬가 깼다. 그는 이번 LG배가 출전 자체가 처음이었고, 파죽의 4연승으로 세계 대회 첫 결승 진출의 꿈을 이루더니 우승까지 차지해버렸다. 중국 위빈과의 결승전은 첫 판을 지고 2국도 마지막 순간까지 좋지 않았으나 혼신의 힘으로 버텨 역전승했다. 특유의 뱃심과 집중력으로 흐름을 바꿈으로써 기어이 정상 정복에 성공한 것이다.

장쉬는 성실성과 겸손함 등 인격적인 면에서도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대회 기간 동안 틈틈이 열렸던 회견 때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법이 몸에 배어있었다. 장쉬의 취미는 사이클 타기로 알려져 있으나 가까운 프로 기사들은 더 좋아하는 게 있다며 웃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매달리는 바둑 묘수 풀이가 그의 진짜 취미라는 것. 여간해선 노래방 따위에도 가는 법이 없다. 이틀거리 도전기 같은 행사 때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포석을 구상하거나 묘수 풀이집을 들여다보는 걸로 유명하다.

묘수풀이를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도 즐긴다. 이것은 바둑 실력만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창의력을 요구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묘수풀이가 발표됐지만 장쉬의 작품 수준은 꽤 훌륭하다는 게 국내외 프로들의 평이다. 묘미와 출제 수준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다는 것. 이것은 장쉬가 단순한 승부사를 떠나 예술가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적어도 일본 바둑계로 국한시켜놓고 본다면 모든 면에서 장쉬의 시대가 만개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문제는 그가 앞으로 국제 바둑계에서도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느냐 하는 것. 하지만 이 문제는 단언하기 쉽지 않다. 제9회 LG배에서 우승하기 직전 일본에서 벌어졌던 제18회 후지쓰배 세계선수권서 그는 최철한에 패해 탈락했고, 5월 초 서울서 열린 제4회 CSK배서는 첫날 김성룡 9단을 꺾었지만 중국 구리(古力)와의 대결에서는 완패했다.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란 뜻이다. 전체적으로 그의 국제전 승률은 5할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 본인도 이러한 국제 대회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는 LG배 우승 후　“정말 운이 너무 좋았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물론 겸손하기 그지없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이벌은 도처에 널려있음을 솔직히 인정한 발언이었다. 누가 세계 최강자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이창호를 꼽았고, 그 다음으론 비등한 1류 기사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장쉬의 이 같은 진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그의 기풍은 전투적이고 승부끼가 넘친다는 평을 듣는다. 예리한 눈매, 날카로운 턱 등 생김새 그대로다. 미학(美學)을 중시하고 지나치게 이론적인 일본 바둑과 비교해 그의 스타일은 상당히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류라고까지 불리는 이런 기풍은 거칠기 짝이 없는 국제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자산일 수 있다. 호전적 초식을 앞세운 일본 최고의 스타 장쉬는 앞으로 국제 무대에서 한․중 양국의 20세 전후 젊은이들과 어떤 승부를 펼쳐 나갈까. 5월 중순 스타트할 제10회 LG배가 이 대회 디펜딩 챔피언인 장쉬에게 최초의 관문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