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기성 상실로부터 1989년의 본인방 획득까지 3년이란 세월은 조치훈에게 있어서 제2의 인생을 위한 휴식이자 재충전의 시기였다.

패배의 상처를 다시금 영광으로 만들기까지의 나날들은 '절치부심(切齒腐心)'이라기 부르기 보다는 아주 밝고 낙천적인 것이었다. 절차탁마의 오기를 생각케하는 일반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이 햇살같은 밝음이 '새로운 조치훈' 낳았다.

3년간 손에 넣었던 타이틀은 기성, 천원, 십단, 후지쯔배 등이었고. 곳곳에서의 무시못할 활약으로 다음 단계를 위한 힘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어쨌든 가까운 장래, 고바야시와의 결전은 피할 수 없으리라.

1986년, 그해 연말, 조치훈은 고바야시의 천원(天元)에 도전하여 2연패 후 3연승의 '작은 역전(?)'으로 생애 첫 천원을 획득했다. 이는 7대 타이틀을 한번 이상 모두 획득, 소위 '그랜드 슬램'이라 평가되는 대기록의 달성이었다.

참조 : 이당시는 세계기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7대기전이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7대 기전을 한차례 이상 석권한 최초의 기사가 조치훈 9단이었고, 이에 바둑계에서는 그 기록에 해당하는 말로 '그랜드슬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세계기전을 한차례 이상 모두 우승하는 기사에게 이 용어를 쓴다.

그러나 한번에 모두를 보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치훈 자신은 이 기록을 그만큼 중시하지는 않았다. 조치훈의 말을 들어 본다.

'오랜 시간을 걸쳐 한가지 목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바둑을 두는 한, 각 대회에서 한번쯤은 우승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과는 별도로 이번 결승(천원전)은 꺼릴 것이 조금도 없었다. 고바야시와는 꽤 많은 타이틀전을 치렀었지만, 이때만큼은 승패에 관계없이 승부를 즐겼다.'

조치훈의 이 말은 2년전의 기성전에 기인하고 있다. 당시 승부의 피해자는 일견 조치훈처럼 보이지만, 훨체어를 탄 사람에게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 승자인 고바야시 또한 떳떳치 못한 승리라는 일반의 견해로 인해 일종의 정신적인 채무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면에선 고바야시 또한 피해자일터.

둘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상대를 훌륭한 적수로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벌을 떠나 호적수로서, 바둑을 둔다는 것으로서, 공감이 조치훈에게서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감정은 승부사에게 있어 한단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즉 승부의 '체념'이 아닌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인정해 나가는 그러한 과정이 아닐까?

아래 소개하는 기보는 마지막판에 몰린 상태에서 맞이한 제3국이다.

중반의 꽤 빠른 시기에 대마사냥을 결심하고 대마사냥에 돌입, 마침에 대마를 포획했던 1국. 대마사냥으로 꼽을 수 있는 바둑은 많지만, 이 바둑도 대마사냥의 명국이다. 고바야시는 백8부터 12의 취향으로 출발했는데,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입회인인 가지와라 다케오(梶原武雄)는 하변에 흑23으로 틀을 갖춘 것에 대해 '이미 이 바둑은 끝났다.'라고 평했다. 흑37로 들여다본 들여다봄으로써 이제 본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치훈은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지만...일직선의 타개와 맹렬한 공격은 조치훈의 특징이다.'

조치훈의 회상을 들어본다.

이 바둑이 끝나고 가지와라 선생과 고바야시와 3사람이 술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가지와라 선생에게 칭찬 받았던 일도 생각난다. 칭찬받았던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조군, 오늘의 바둑은 훌륭했네. 코흘리개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사고를 극복하고 훌륭히 재기에 성공했잖은가.' 라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조치훈은 제3국을 승리한 후 제4, 5국에서 연승하여 마침내 천원이 됐지만, 1인자의 고바야시에게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다관왕으로서의 여유였을까? 아닐것이다.

천원전 결승 승부의 마지막 최종승부는 조치훈이 이겼지만 앞으로도 숱하게 있을 승부에 대해 고바야시의 자신감이 또한 굉장했던 것이다. 조치훈이 승부사로서 한 단계 성숙했듯이, 일본랭킹 1위를 차지한 고바야시 또한 그에 걸맞게 발전을 이뤄냈던 것이다.

조만간 둘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둘은 그것을 알고 있다.

(류승필 사이버오로 컨텐츠 팀장 spryoo@badu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