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은 고바야시와는 워낙 큰 기전에서 많이 싸웠기 때문에 군소기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잊을 수 없는 바둑이 하나 있다. 기억력이 남보다 좋다고 할 수 없는 조치훈이 지금도 이 바둑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작은 기전이지었음에도 우승의 기쁨은 대기전에 필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류기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서 타이틀에 대한 간절함이 달라진다. 1986년은 고바야시의 시대가 막을 올린 해이다. 패자인 조치훈은 당연히 뒤쫓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86년전 속기선수권전 결승 3번기는 기성전의 후반부에 있었는데, 기성전 제6국이 있은지 불과 이틀 후에 결승3국이 열렸던 것이다.

' 무관이 된 직후였기에 이 우승은 몹시 기뻤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내의 부축으로 TV도쿄의 스튜디오에서 대국을 했던 정황은 물론, 바둑의 세부적인내용도 잘 기억하고 있다. '

조치훈의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교통사고, 무관, 그리고 4개월의 입원생활과 함께 시작된 1년 가량의 재활치료는 조치훈의 기사인생에 있어서 시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 꺾였던 것도 아니고, 실망이나 낙담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행운이었다'라고 조치훈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운이었던가? 조치훈의 말을 들어보자

' 기성전이 시작될 무렵, 스키 점프의 笠井선수가 큰 부상을 입어 선수생명이 끝나는 것을 보았다. 그에 비하면 바둑은 고마운 것이라 생각했다. 두뇌와 손만 있으면 계속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 그것이 행운의 하나.

그리고 또 있다. 주변에서는 교통사고 뒤의 극심한 부상상태에서는 도저히 바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치훈에게 있어 자신이 사고 때문에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제6국에서 패배로 기성을 상실한 후의 인터뷰에서도 '패한 것과 사고는 관계가 없다'라고 단호히 말했던 것이다.

'나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가 없는 상태에서 패했더라면 그 후는 틀림없이 술에 쩔어 있거나 다른 곳으로 도피하거나 하는 등, 바둑에서 멀어져 있었을 것이다. ' 조치훈의 거듭되는 회고이다.

바둑은 바둑, 현실은 현실, 현실은 도피할 틈을 주지 않는다. 조치훈은 냉혹한 현실앞에서 부상한 다리를 빨리 회복해야 했다. 재활에 집중해야 했다. 걷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기에 빨리 회복해야 했던 것이다.

일본기원에서 두는 보통의 대국에서, 조치훈은 사고 발생 초반기에 부인과 항상 동반했다. 6층의 큰방에서 기록되지 않는 바둑을 둔 일도 있다. 신문에 게재되지 않는 대국은 초일류 기사에게 있어서 한없이 슬픈 일이었다. 그 슬픈 장면에 부인이 함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바둑 외적인 냉혹한 현실을 경험한 점)도 교통사고는 조치훈의 승부 인생에 있어 일종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휠체어를 벗어나 목발로 대신했다. 고바야시에게 1인자의 자리를 넘겨준 쇼크는 이제 현실적인 문제앞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 걷는다라는 목표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부상 회복은 의사의 예상보다도 빨라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도 멀리 걸을 수 있게 됐고, 하이킹으로 땀을 흘리며 재활에 열중했다. 수영도 빼놓지 않고 계속했다.

재활에 열중하는 동안 그해 여름에는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기성(碁聖)에게 도전, 3 : 0 스트레이트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의사의 예상보다 빨리 부상에서 회복했던 것처럼, 타이틀 복귀 역시 바둑관계자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조치훈-고바야시의 라이벌 관계로만 보면, 이 무렵은 필생의 라이벌이 서로를 크게 의식할 수 없었던 '승부의 진공 상태'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치훈은 비상하는 고바야시를 의식하고 있을 틈이 없었으며. 바둑에 의욕적으로 뛰어들기 이전에 몸을 먼저 회복해야 했다.

조치훈이 전과 다름없이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날, 새로운 투지와 거듭난 용기로 우뚝 서는 날, 그 지점에서부터 또 다시 새로운 라이벌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류승필 사이버오로 컨텐츠 팀장/ spryoo@badu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