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大家)를 향한 과제

이세돌은 바둑계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웠던 제36기 왕위전 도전5국에서 패퇴함으로써 '이창호 무너뜨리기'에 실패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이창호-이세돌 라이벌시대'의 화려한 개막도 유보됐다.

그러나 이세돌은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었고 그만큼 얻었다. 후지쯔배 우승으로 사천왕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고 아쉽게 물러서긴 했지만 이번 왕위전 도전기에서도 최종국까지 세계최강 이창호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근성과 투지를 보여 팬들의 뇌리에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스타가 된 것이다.

2년전 폭풍같은 32연승의 질주를 시작할 때 부터 스타였지만 이제는 일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별똥별이 아닌 진정한 붙박이별로 자리를 잡았다.

이세돌에겐 훌리건을 방불케하는 극성팬들도 많다. 이세돌의 대국이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날 사이버세계로 몸을 옮기면 이세돌을 응원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갤러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월드컵 스타 김남일과 곧 잘 비교되기도 한다. 뛰어난 기량을 갖춘데다 진솔하고 거침없는 언행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이 열아홉의 앳된 이 청년에게는 아직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가야 할 길도 멀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등정목표는 '세계의 지붕 이창호'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는 물론 이세돌 자신도 선뜻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이루어야 할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이세돌이 가야할 길에는, 많은 동네 아이들까지 바둑을 가르친 아버지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하는, 공부도 있었으면 싶다. '자타불이(自他不二)는 불가(佛家)의 사람들만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은 그가 '바둑한냥 사람 서푼'이라는 비아냥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바둑을 좋아하는 나의 소박한 꿈은, 눈부신 재능을 가진 한 청년이 하찮은 시시비비에 얽혀 상처받지 않고 올곧게 성장해서 이창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하나의 '세계의 지붕'으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이다.

( 손종수 / wbstone@baduk.or.kr 농심신라면배 관전필자)

○... 관련기보는 이세돌 3단이 제7회 LG정유배 프로기전을 우승한 결승4국. 이 대회의 우승은 2002년도의 실질적인 국내 메이저 기전의 정상을 점한 것으로 이창호 9단과 정상다툼을 벌인다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