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네 . 다른 기사들과 겨룰 때는 더 없이 침착하고 흔들림도 없는데 이세돌하고 만나기만 하면 흥분하는 것 같아..."

언젠가 기사실에서 '이창호 : 이세돌'의 기보를 놓아보던 임선근 九단이 독백처럼 흘린말이다. 프로들이란 참 별난 눈을 가진 사람들이가 보다. 달랑 기보 한장만을 보고도 그런 감정의 편린들을 척척, 집어낸다.

많은 기사들이 '이세돌의 바둑은 뭔가 사람을 홀리는 게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전에는 조훈현에게 꼭 같은 말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속칭 '흔들기'다. 오랜 세월, 아니 지금까지도 조훈현과 겨루는 기사들은 아무리 유리한 형세라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언제 어느 곳에서 '흔들기'를 당해 어지럼증에 시달리다가 속절없이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흔들기'는 돌의 급소를 정확하게 짚는 감각과 빠른 수읽기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세돌이 누구의 가름침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훈현과 꼭 같은 아니, 어떤면에서는 더욱 상대가 괴로워하는 '흔들기'를 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앞서 밝힌대로 이세돌은 '닮은 꼴 조훈현' 이니까.

그런데 '이창호가 이세돌하고 만나기만 하면 흥분한다'고? 어디 그런 장면있나 찾아보자.



제36기 왕위전 도전4국
● 이창호 9단 ○이세돌 3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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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이 실리로써 꽤 앞서 있는 장면. 하변에서 흘러나온 흑 일단만 대과없이 타개하면 흑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는데 실리부족을 의식한 이세돌 3단이 백 △로 나가 끊어 노골적으로 잡으러 왔다. 흑1은 당연한 반격, 백은 내친걸음이므로 2,4로 재차 끊고 늘 수 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공격은 백의 무리인데...



1도(백 곤란)

백 1때 흑2로 하나 젖혀두고 4로 씌웠으면 백이 곤란했다. 이 수로, 실전처럼 회돌이를 당할 일도 없고 몸통을 크게 떼어 주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실수는 있는 것이지만 이런 장면에서 흑2와 같은 간단한 수를 읽지 못했다는 것은 '부동심(不動心)의 이창호'답지 않다. 뭔가 백 △의 도발때부터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닌지...




2도(실전진행)

수순은 좀 길지만 백24까지, 흑이 참담하게 망한 모양이다. 하나 젖혀두는 간단한 수를 놓쳐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다니.... 여기서 백의 승리가 결정됐다. 이 대국은 '되지 않는 것을 되게 만든' 이세돌의 도발적인 '흔들기'가 돋보인 한판이다.

(손종수 농심辛라면배 관전필자 / wbstone@baduk.or.kr )

●... 관련기보는 위 그림의 총보인 제36기 왕위전 도전4국, 백을 쥔 이세돌 3단이 2집반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