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눈앞에 파란 약병이 놓여 있다. 겉 표지에 ‘기력급증액(液)’이란 금박으로 인쇄된 글씨가 보인다. 처방난을 보니 빠른 기력 증강에 특효라고 나와 있으며, 그 밑으로 ‘임산부와 노약자조차 복용 시 약사와 의논할 필요 없음(부작용 無)’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 어떤가? 당신이라면 오늘 당신에게 모멸감을 안겨준 얄미운 라이벌을 떠올리며 단숨에 약병을 비울 것인가? 아니면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하며 보던 신문을 집어들 것인가?



오늘의 주제는 ‘대회 참가’. 바로 기력 증강의 특효약이다.
이 약 한번만 잡숴봐~ 바로 두 점은 늘어~

많은 바둑대회가 지금껏 열려왔고, 앞으로도 열릴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열리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바둑대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강호들이 모여드는 전국규모 대회에서부터 동네 기원의 소주 한 박스를 건 아담 사이즈 대회까지 그야말로 하늘의 별같은 바둑대회가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 마디로

‘세상은 넓고 대회는 많다’.

대회에 나가면 왜 바둑이 느는가? 왜 기력 급증의 특효약인가?
대회에 참가하여 다른 사람들, 특히 모르는 이들과 기량을 겨룬다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자, 경험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바둑을 보는 눈을 한 차원 더 높게 틔워준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 느끼는 가벼운 전율, 본선진출 티켓을 놓고 바둑판 앞 상대의 콧김을 쐬는 일, 패배의 쓰라림, 승리의 쾌감, 역전의 짜릿한 ‘손맛’, 입상의 흥분. 그야말로 대회장은 기력향상을 위한 환락의 궁전이요, 유격훈련장이다.

대부분의 대회는 무료이다. 참가비가 있어봐야 1, 2만원 수준. 기념품 받아오고, 대회 출전의 효과를 곰곰이 따져보면 터무니없이 싼 값이다. 입상까지 할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남아도 크게 남는 장사.

첫 단추가 어렵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발걸음만 떼면 반은 간 셈이 아니라던가?
상을 꼭 받아야겠다는 부담은 비듬 털 듯 가볍게 버리자. 어깨에 힘을 빼고 칵테일 파티에라도 참석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대회를 즐겨보는 거다.

혼자서 나가는 것이 정히 두렵다면, 친구와 함께 나가자. 두려운 마음도 사라질뿐더러 누가 더 많이 올라가나 경쟁심을 유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회 후 쓴 소주로 뒤풀이를 하는 재미 역시 빼놓을 없다. ‘아, 그때 거기서 손을 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글쎄, 그 치중을 못 봤다니까’ 등등을 안주 삼아.

이렇게 한두 번 정도 대회에 나가다 보면 어느새 ‘대회중독증’에 걸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잡지, 신문 등에서 대회공지를 볼 때마다 피가 끓으며 손목의 정맥이 파르르 솟는 걸 느끼게 되면, 당신은 바로 ‘대회 중독증 환자’.

작은 대회부터 나가자

처음부터 전국규모의 메이저무대에 오르는 것은 무리이다. 천하의 박찬호도 메이저생활 며칠만에 눈물의 마이너리그 행 버스를 타지 않았던가?

우선 눈을 주변으로 돌려보자. 동장배, 이장배, 구청장배 등의 지역대회부터 공략해 보자. 아니, 평소 다니는 기원의 원장배도 좋다. 여하튼 대회 형식을 갖추면 그만이다. 바둑을 둘 수 있고, 경쟁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운이 좋으면 장려상 하나쯤 받을 수도 있겠다. 정말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감투상 수상자가 될지도 모른다. 한번 상에 맛을 들이면 대회중독증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천재를 만들기 위한 최상의 무기는 ‘칭찬’이라 하지 않던가?

단체전이 재미있다
관전자 입장에서라면 개인전이 흥미진진하겠지만, 참가자로서는 단체전이 재미있다. 아마추어 대회의 백미는 역시 단체전. 같은 팀원끼리 소속감을 갖고 팀웍을 이루다보면 평소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천하의 기적(棋敵)과도 없던 전우애가 솔솔 붙는다.

이기면 영웅이요, 지면 역적이라지만 승부를 떠나 단체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릴감을 맛보게 해준다. 목이 터져라(물론 마음속으로만) 응원을 하고, 팀원끼리 머리를 맞대 우리편의 다음 수를 연구하고(물론 훈수는 금지), 주장전을 국수전 도전기보다 더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대회 후 팀원끼리 대폿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마시는 소주맛은 또한 어디에 비기랴.

벼락치기를 아는가?

학창시절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설탕조차 타지 않은 시커먼 커피를 대접으로 마시며, 그것도 모자라 약국에서 각성제까지 사다 먹어가며 밤을 홀딱 홀딱 새우던 기억. 하얀 세면대 위에 번지던 붉은 코피.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치켜든 시야에 들어오던 눈부시리만큼 파랬던 새벽.
벼락치기의 묘미는 바둑대회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평소에 잘 읽히지 않던 정석책, 사활집, 끝내기책 등이 대회를 코앞에 둔 시점에선 마치 만화책처럼 술술 넘어간다. 특히 골치 아프기 짝이 없던 ‘꼼수’ 관련책이 바이블처럼 소중해진다.

모두가 대회에 나가 ‘한 건’을 올리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이다. 초반에 난해한 정석을 펼쳐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거나, 속임수를 이용해 크게 한탕 하자는 속셈. 그러나 ‘화이트 거짓말’처럼 이쁜 꼼수가 아닐 수 없다.

기자가 만난 아마5단 L씨는 자신이야말로 벼락치기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라 고백한다. 이런 벼락치기 덕에 L씨는 대학시절 단체전 학교대표로 출전해 우승, 대망의 아마5단증을 손에 넣은 입지전 적인(?) 인물이다.

“대회 직전처럼 공부가 잘 되는 때도 없다. 그 난해한 귀의 됫박형 사활, 대사정석, 외목정석 등을 나는 벼락치기를 통해 익혔다. 평소라면 누가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을 들여다보겠는가? 벼락치기가 우습다고? 학창시절 단박에 5등에서 10등은 끌어올릴 수 있는 게 벼락치기의 위력이다. 대회를 앞두고 몰아치는 벼락치기 공부, 이거야말로 진짜 당신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

○... 오로바둑에서는 여러가지 인터넷 대회를 하고 있는데, 가끔씩은 대회정보를 공지사항등에서 확인해 보면 된다. 일반 아마추어 대회는 한국기원 홈페이지, 혹은 월간바둑등에서 신청방법과 기간, 참가자격등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종합바둑인 양형모 /ryuhon@badu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