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기성전도전5번기에 즈음한 넋두리라고나 해야 할까. 아무래도 좋다. 마음의 부담 없이 가볍게 읽어주시길….

품안에서 키운 호랑이 이창호에게 내몰려 변방에서, 해외로 속절없이 밀려났던 그가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기성전도전무대로 돌아왔다. 98년 2승 3패의 아쉬운 고배를 들이킨 지 5년만이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는 조훈현의 철혈시대가 아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바둑사에 유래가 없는 사제대쟁기(師弟大爭棋)로 국내타이틀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이제는 간간이 도전자의 명패를 거는 정도. 가장 가까운 시기의 사제쟁기의 기록도 2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제45기 국수전도전5번기. 조훈현 1승 3패 타이틀방어 실패).

조훈현은 그런,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타이틀무대 위로 돌아왔지만 그는 결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황제의 철권통치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조훈현 매니아'들은 그의 화려한 복위를 갈망하지만 이미 그의 목표는 1인자의 권좌가 아니다.

그럼,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사실, 조훈현에게는 더 이상 목표가 없다. 그는 바둑이라는 세계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룬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최연소의 기록으로 프로의 첫발을 내디뎠고(아홉살 프로 입문의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살아있는 기성(棋聖)으로 불리는 우칭위엔(吳淸源) 선생과 사형제간의 연을 맺었으며 한국의 타이틀전을 세 차례나 완벽하게 평정했다(80년 9관왕, 82년 10관왕, 86년 11관왕- 전기전 제패).

그뿐인가. 타이틀 최다연패(패왕전 16연패), 타이틀 최다획득(157회)의 금자탑을 쌓았고 89년 홀홀단신으로 세계무대에 올라 응씨배 우승을 차지, 세계바둑계의 변두리취급을 받던 한국바둑을 단숨에 일본, 중국의 앞자리로 끌어올린 신인(神人)이 바로 그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룰까.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의 목표는 없다'는 말은, 타이틀쟁취의 의지마저 사라졌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에게 타이틀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다. 그는 어떤 목표를 위해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바둑을 두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그 무엇이 조훈현으로 하여금, 그의 바둑을 더욱 강렬하고 뜨겁게 일으켜 세우는 것일까. 그것은 끊임없는 '존재의 확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에, 이 세계에 실존하는 '나'의 확인이다. 팬들을 열광시키는 대역전승과 타이틀획득의 영광은 그 연장선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의 목표가 한낱 승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90년대를 아로새긴 사제대쟁기로부터 최근 시작된 대 신예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바둑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는 '이기는 길'보다 좀더 '조훈현다운 길'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본디 강철기둥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외양으로 드러나는 말과 표정은 더없이 부드러워졌지만 내면에 뿌리박힌 강철기둥은 추호도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못하는 승부의 성벽(性癖)은 더욱 견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전판에 불을 붙이는 전투의지로 새롭게 얻은 '화염방사기'라는 닉네임, 삼성화재배 8강전(대 뤄시허전)에서 기적 같은 대역전승을 거두면서 듣게 된 '하늘이 돕는 조훈현'이라는 표현, 심지어는 우위를 점하다 종반에 무너진 농심신라면배 대 후야오위전의 실패까지도 모두 그 '조훈현다움'의 자명한 결과다.

또한 그것이 조훈현에게 많은 승리와 그에 따르는 부와 명예를 안겨준 것도 사실이지만 '조훈현다운 길'이 반드시 '이기는 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조훈현의 바둑은 눈앞의 장애를 모조리 날려버리거나 태워버리지 않고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불과 같고 바람과 같아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울창한 숲에 갇히면 스스로 지쳐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이창호의 바둑이 그와 같다. 태워도, 태워도 끝없이 펼쳐지는 숲, 폭풍우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밀림이 바로 이창호의 바둑이다. 바로 눈앞에서 조훈현-이창호 사제의 제14기 현대자동차배 기성전 도전5번기의 막이 올랐는데 아무도 이 승부의 결과를 화제로 삼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초로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 90년대 초부터 둘은 극성(極性)이었으며, 과거의 조훈현보다 더 조훈현다워진 현재의 조훈현은, 과거의 이창호보다 더 이창호다워진 현재의 이창호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타고난 중정(中正)의 자세를 스스로 허물지 않는 한 이창호는 천하인의 극성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랴. 팬들은 더 이상 조훈현의 패배에 실망하지 않는다. 이미 조훈현 스스로가 1인자의 권좌를 목표로 하지 않듯,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팬들도 황제의 화려한 복위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팬들은 때때로 조훈현의 승리를 갈망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가 '조훈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가 정상의 무대에서 펼치는 바람과 불의 현란한 춤사위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팬들은 국내타이틀을 석권하고 세계타이틀을 움켜쥐는 황제의 부활보다, 바둑판을 대하면 눈빛이 소년처럼 푸르러지는, 청년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의 존재를, 그의 이름을 간절히 원한다. 조훈현, 너무나 조훈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