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전체가 마치 가마솥이 된 듯한 요즘.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당최 일손이 잡히지 않고, 작은 불편함에도 짜증이 울컥 솟구친다.

이럴 때 문득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시원한 막국수다. 조금 거친 메밀의 깔끄러운 느낌이 더위에 풀죽어 있던 혀의 미뢰(맛봉오리)들을 곧추세우고, 새콤하면서 달콤한 육수는 잠자는 식도를 흔들어 깨운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그야말로 보약 같은 먹거리다.




실제로 한방에서 ‘교맥(蕎麥)’으로 불리는 메밀은 체내의 열을 내려 주고 무더위로 인한 내장기관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의보감>에도 “메밀은 비장과 위장의 습기와 열기를 없애 주고 소화가 잘 되게 하는 효능이 있어 묵은 체기를 내려준다”는 구절이 나온다. 몸에 쌓인 열기와 노폐물을 없애 몸을 가볍게 하고 기운이 돋게 한다는 얘기다. 연일 이어지는 승부로 긴장과 스트레스가 쌓인 프로기사들에게는 아주 좋은 음식인 것.




그 메밀을 찾아 메밀꽃을 닮은 박지은 9段과 맛여행을 떠났다. 5호선 서대문역과 충정로역 중간쯤 피어리스빌딩 건너편 골목에 있는 ‘봉평메밀막국수 푸른초장’(02-362-1172)으로….

기막힌 맛에 즐겁고, 싼값에 놀라고
이 집의 대표 먹거리는 흔하디흔한 막국수다. 하지만 이름이 흔하다고 해서 맛도 ‘거기서 거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가는 자칫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집 막국수는 육수부터 다르다. 멸치와 양지 등으로 육수를 만드는 춘천 막국수나 닭발로 깊은 맛을 내는 여주 천서리 막국수와 달리, 이 집은 황태 머리와 다시마, 동치미, 양파, 대파 등으로 담백한 육수를 우려낸다. 그 국물 맛이 모 CF의 멘트처럼 정말 끝내준다. 또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뽑는 면발은 자신이 메밀임을 잊은 양 탱글탱글함을 뽐낸다.




주인장이 ‘가문의 비법’이라고 자랑하는 양념장에 몸을 적신 비빔막국수나 푸짐한 양이 맘에 쏙 드는 쟁반막국수도 오감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한 끼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맛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메밀막국수를 먹기 전에 꼭 맛봐야 할 것이 있다. 메밀전, 메밀전병, 메밀묵무침 등 메밀요리다.




불판에 밀가루 빈대떡처럼 얇게 깔린 메밀전이나 엉성하게 만 김밥같이 생긴 메밀전병은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영 아니올시다’이다. 하지만 담백한 맛의 메밀전이나 당면과 야채의 싱싱함이 그대로 씹히는 메밀전병은 패스트푸드 따위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그윽한 자연의 맛을 전한다. 새콤달콤한 묵무침은 10년 전 몸을 떠나 입맛도 돌아오게 할 만큼 입 안을 행복하게 만든다.

사실 박9段 이전에 이 집을 다녀간 프로기사가 있다. ‘돌부처’ 이창호 9段이다. 수개월 전 이9段과 그의 피앙세 이도윤 양이 이미 이 집의 ‘맛거리’에 반한 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뒤늦게 초대한 박9段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 집의 또 다른 ‘맛거리’ 하나를 주문했다. 바로 ‘훈제유황오리찜’이다. 메밀도 그렇지만, 오리고기 역시 몸의 열을 낮추고 몸에 쌓인 독성을 풀어내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고기만 놓고 보면 이 집이 다른 집에 비해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메밀요리와 어우러진 오리고기는 ‘환상 궁합’을 뽐낸다.




평소 입이 짧은 것으로 생각해온 박9段도 이날은 젓가락을 움직이기에 바빴다. 연방 ‘맛있다’는 탄성을 터뜨리면서…. 물이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환한 얼굴로 부딪쳐 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박9段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국민 바둑 오누이’로부터 합격점 이상의 점수를 받은 이 집은 가격까지 착하다. 서너 명이 메밀전, 메밀전병, 메밀묵무침, 후식으로 곁들이는 메밀막국수, 그리고 훈제유황오리찜(작은 것) 등으로 배를 두드려도 5만 원 정도면 족하다.여기에 주인장 내외의 친절한 서비스는 달아난 입맛뿐 아니라 눅눅해진 기분까지 돋우는 ‘양념’이다.



월간바둑 7월호

[글 : 스포츠칸 엄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