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때 나는 한국기원 옆 중국집 배달원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 기사들도 자장면은 먹을테고 그러면 한국기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할 수 있을 것이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철가방'을 들고서라도 조훈현·이창호 九단 등등의 프로기사를 가까이 볼 수 있기를 기꺼이 희망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내가 음악하기를 얼마나 잘한 일인가를 실로 가슴 뭉클하게 느낀다. 가수가 되지 않았고, 히트곡을 내 뜨지 못했다면 어떻게 반상의 권두운을 타고 온갖 요술을 다 부린다는 서능욱 九단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인가.

바둑은 음악과 더불어 내 청년기의 길고 긴 방황에 놓칠 수 없는 한가닥 희망이자 위안이었다. 약골로 병원에 의지해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빨간 차압딱지가 몇 차례에 걸쳐 붙여졌던 집안의 몰락, 가출, 고등학교 중퇴, 그리고 하얀 알약을 수북히 털어넣지 않고서는 도저히 탈출구가 없을 것 같았던 세상…. 막노동에 야채장사, 시계 외판원, DJ… 안해본 일 없이 그 가파른 서른 몇 해의 세상을 거닐어오는 동안 그래도 내가 살아남을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음악과 바둑 덕이었다.

누군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감히 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봤노라고 할 순 없어도 적어도 '눈물 젖은 바둑은 두었노라'고 말할 순 있다.

데뷔 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연주하던 시절은 아침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공연이 시작되는 저녁때까지의 오후나절을 근처 한양기원이란 곳에서 노상 살다시피 했었다. 어느 기원이나 그렇듯, 기원안 사람은 각양각색이고 풍경은 선술집마냥 허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는데도 마치 시트콤 드라마처럼 각별하고 재미있다. 그때 내기바둑에서 딴 날은 저녁상에 삼겹살 근수깨나 올라가고 털린 날은 '라면 땜방'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기원 사범과 바둑을 두다가 그 유명한 배붙임 수를 당했다. 분명 내가 한수 빠른 수상전임에도 상대가 계속 수를 진행시키길래 '이거 한 건했구나'내심 쾌재를 불렀는데 그 순간 배붙임 수가 등장했다. 배붙임의 맥을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나는 너무나 감복한 나머지 한 5분 가량 멍하니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나왔으니 그야말로 '눈물 젖은 바둑(?)'이 아니겠는가. 그때 십중팔구 상대는 내가 너무 억울하게 져서 흘린 눈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절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안 보여서 그렇지 그렇게 재미있던 날들이었다.

은퇴후 바둑살롱을 여는 게 꿈

바둑을 배운건 초등학교 2∼3학년 때이다. 그때 바둑반의 반장을 맡기도 했는데 충암초등학교 바둑반과 대항전을 벌였다가 몰패를 당한 기억이 새롭다. 대항전은 선생님 대 선생님, 반장 대 반장끼리 붙는 식이었는데 바둑명문인 충암에 한 판도 못 건지고 영패를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한때는 충암으로의 전학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몸이 허약해 병원문턱을 넘나드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승부욕이 유달리 강한 나로서는 그때부터 프로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방송공연을 할 때는 보통 오후1∼2시쯤 나가서 리허설을 하고 오후 7시쯤 본방에 들어가는데 그 막간을 이용해 바둑을 둔다. 대학 후배인 로드매니저는 내게 석점 하수인데 이 친구와 같이 일하게 된 건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바둑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 더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룹
시나위의 신대철과 같이 공연하는 날은 리허설이고 뭐고 없다. 신중현 선생의 아들로 유명한 신대철은 내게 여섯점 하수인데 바둑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차에 숫제 바둑판을 싣고 다니는 광이다. 바둑을 두다가 출연 순서가 되어 나갈 때 우리 두 사람이 신신당부하는 멘트는 한결같다. "바둑판 치우지마. 끝내고 계속 두
게…." 그런데 얼마전 신대철이 『바둑가이드』와 인터뷰한 것을 보니 자칭 4급이라고 했던데,

아! 공적인 잡지를 상대로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물1급인 내게 여섯점이나 까는 하수가 4급이라니…. 이 기회를 빌어 대신 정정기사를 내보냅니다. '신대철 8급! 검증-김장훈'.

꿈이란 반드시 거창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내 소박한 꿈을 은퇴 후 '바둑살롱'을 하나 여는 일이다. 사방 벽면에 가수 김장훈의 콘서트 사진을 걸어놓고 기원 단골손님들이 그 사진을 보며 '아, 우리 원장이 젊었을 땐 유명한 가수였구먼'하는 소리를 듣는 즐거운 상상…. 언젠가 바둑잡지에서 입단대회에 관한 칼럼을 읽었는데, 입단의 꿈을 꾸는 단 한 명의 로맨티스트가 남아있는 한 그를 위해서라도 입단대회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가수가 되어 버린 내게 음악은 이제 그 어떤 반대급부가 생기는 현실, 리얼리스트로 만들어 버렸지만 취미인 바둑은 그런 반대급부의 아픔이 없는,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남게 하는 도원경이다. 어쩌면 입단을 꿈꾸는 마지막 단 한 명의 로맨티스트가 있다면 그건 필경 나일 것이다.

ps - 인생을 알고, 음악을 알고, 바둑을 아는 가수 김장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