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세계대회가 한꺼번에 몰려있는 해다. 바둑올림픽인 응씨배가 여섯 번째 무대를 활짝 열어젖히고 격년제로 열리는 도요타덴소배와 춘란배가 2008년에 동시에 열리게 된다. 거기에다 매해 치러지는 LG배 세계기왕전과 삼성화재배, 후지쯔배도 팬들의 환호성을 기다리고 있으니 별들의 잔치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움이 가득한 한 해다.

2008년의 패권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신3인방인 이세돌, 이창호, 박영훈 9단 외에 랭킹 10위권 기사들의 전력을 조명해본다.


이세돌 9단

한국은 랭킹 1위부터 3위인 ‘신3인방’ 이세돌, 이창호, 박영훈 9단의 입지가 상당히 크다. 그중 2000년 중반 들어서 이창호 9단의 맹주를 깨뜨리고 새로운 1인자로 올라선 이세돌 9단의 활약이 가장 눈에 띄는데 현재까지 7개의 타이틀을 두르면서 최다관왕에 올라있다. 얼마 전 박영훈 9단을 누르고 삼성화재배를 품에 안은 것과 도요타덴소배, TV바둑아시아선수권전까지 세계대회 타이틀만 세 개나 쥐고 있다. 국내에서도 파괴력 넘치는 행보로 명인과 국수 등 큼지막한 타이틀을 네 개나 차지했으니 1인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위용이다.

이세돌 9단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세계대회에서 세 개 정도는 우승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1월엔 삼성화재배를 우승했고 2월 말엔 한상훈 2단과 LG배를 놓고 격전을 치르게 되는데 LG배까지 우승하게 된다면 목표의 절반을 달성하게 되는 셈이다. 현재 이세돌 9단의 컨디션 상태나 꺾일 줄 모르는 기세의 흐름만 보더라도 자신이 말한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다만 과도한 대국일정으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할 경우 갑작스런 슬럼프에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주의해야한다.
“제 바둑은 기세입니다. 계속 이기다 보면 자신감이 붙고 누구와 붙어도 진다는 생각을 안하죠.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흐름이 끊기다 보면 저도 모르게 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세돌 9단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기세를 타다가도 갑작스레 하향세로 돌아설 수 있다는 자가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까지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고 있진 않지만 이런 위기가 찾아오지 않게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진 말아야겠다.

2008년은 이세돌 9단이 세계와 국내 무대를 모두 아울러 확실한 독주체제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경쟁자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양강체제로 갈 것인지 판가름할만한 한 해다. 그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대상은 이창호 9단과 박영훈 9단, 구리 9단, 장쉬 9단 정도를 언급할 수 있는데 가장 강력한 대상으로는 단연 이창호 9단이겠다.

위에 열거한 기사 중 이세돌 9단이 상대전적에서 유일하게 뒤지는 기사가 이창호 9단이고 팬들 역시 이세돌 9단이 이창호 9단을 넘고 1인자로 올라섰는지에 대한 명제가 확실히 풀리지 않았다. 아무쪼록 2008년 두 기사의 충돌은 개인적인 명예와 맞물려 1인자 다툼의 도화선으로 불붙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창호 9단

2008년의 화두는 단연 이창호 9단이다. 2007년 무관의 위기에까지 빠지면서 저조한 한 해를 보냈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올 초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현재까지 17연승을 질주중이며 십단전에선 목진석 9단을 2-0으로 셧아웃 시키고 타이틀을 추가했다. 국내 타이틀은 3관왕, 중환배까지 더하면 총4관왕이다.

이창호 9단의 말 한마디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인기상을 수상한 다음 소감을 묻는 자리에 “올해는 이세돌 9단을 무섭게 해주고 싶습니다.”며 농담반 진담반이 섞인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는데 말한바 대로 완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료기사들 역시 이창호 9단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엔 이창호 9단답지 않게 끝내기에서 실족한다던지 초읽기에 몰리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내용면에서도 확실히 제 컨디션을 찾고 있다는 게 눈에 보입니다. 싸움보다는 타협을 통해 계가까지 가는 경우가 이전 스타일이라면 요즘엔 전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닥뜨리더군요. 정교함에 완력까지 더해졌다 봐야 하는데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올해 이창호 9단의 활약은 엄청날 것 같습니다.”

이창호 9단의 기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올해는 국내무대와 세계무대를 통틀어 이세돌 9단과의 군침 도는 대결도 자주 볼 수 있을 듯 하다. 한국랭킹 1위를 탈환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세돌 9단과 점수차가 꽤 나기 때문에 당장은 힘들 겁니다. 일단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겠죠.”라며 간접적으로 랭킹1위 탈환에 대한 욕심을 내비추기도 했다.

랭킹제로 세계대회 출전권을 주기 때문에 올 한해 이창호 9단은 모든 세계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 그가 거둬들일 수확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박영훈 9단

박영훈 9단으로선 1월에 벌어진 삼성화재배 패배가 무척 쓰라리게 다가온다. 지난해 GS칼텍스배에서 이세돌 9단을 상대로 2연패 후 3연승이란 짜릿한 뒤집기승을 거둔 그가 삼성화재배에선 2-1로 무릎을 꿇었다.

삼성화재배 최종국에선 승리를 눈앞에 두고 막판에 실족해 그를 응원하는 팬들로선 진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는데 삼성화재배 패배의 후유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듯 최근에 벌어진 명인전 예선과 전자랜드배 청룡왕전에선 잇달아 패하고 말았다. 중요한 대국이 연이어 다가오는 시점에서 제 컨디션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입단한 이후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박영훈 9단인지라 그의 갑작스런 추락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무대에서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순탄한 행보를 장담할 순 없겠다.

동료기사들은 말한다. 박영훈 9단이 형세판단과 종반마무리 능력에선 타의추종을 불허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강하게 나갈 때 한 번 정도 늦추게 되는 미온한 면을 약점 아닌 약점이라 지적한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고 잘 무너지지 않는 바둑이지만 이세돌 9단이나 구리 9단 같은 현란한 인파이터들에겐 종종 애를 먹기도 하는 것이 단적인 예. 역전승이 많다는 것도 이런 면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박영훈 9단으로선 2008년이 지속적인 도약의 한 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부진한 한 해가 될 수도 있다. 잘 무너지지 않는 바둑처럼 기복이 심하지 않는 대표적인 기사이기 때문에 정상 3인방을 이탈하진 않을 것이다. 삼성화재배의 패배를 잘 추스르고 2월말부터 시작되는 신라면배, 3월에 시작되는 맥심커피배 결승, 기성전 방어전 등 중요한 고비를 잘 넘겨야 하겠다.


한상훈 2단 외

맨 처음에 열거했듯이 신3인방의 입지는 상당히 크다. 현재 한국랭킹 10위권에 포진된 기사들 중 이 ‘삼각편대’를 뛰어넘은 기사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최철한 9단의 급작스런 몰락이 안타까운 사실로 다가오는데 랭킹 4위의 목진석 9단과 5위 조한승 9단 등 정상 문턱을 두들겼던 그들이 ‘삼각편대’에 막혀 번번이 쓴 잔을 들이킨 사실은 잘 알고 있으리라.

이들의 최대 과제는 신3인방의 벽을 어떻게 뛰어 넘느냐다. 이 중에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기사를 거론한다면 한상훈 2단을 꼽고 싶다. 이미 입단 첫 해부터 다이너마이트 같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각종기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지라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망주다.

한상훈 2단은 자신감이 가득하다. 초단 신분으로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진출한 것도 대단한 사건인데 그는 인터뷰를 통해 우승이 목표임을 당당히 밝혔다. 천하의 이세돌 9단이라 할지라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그 충만한 패기에서 무궁무진한 발전성이 엿보인다.

LG배 결승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결과 여하를 떠나 큰 무대 경험만으로도 그의 2008년 활약은 2007년보다 더 대단할 것으로 예견된다. 현재까지 8승 1패의 성적을 거둔 것과 입단 1년 2개월여 만에 전자랜드배 청룡왕전 우승은 기록적인 성과물이다.

한상훈 2단 외에 랭킹 6위의 강동윤 7단, 7위 원성진 9단, 8위 이영구 6단도 언제든지 정상 문턱을 치고 올라갈 준비가 돼있는 기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확실한 눈도장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전자랜드배에서 이창호 9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강동윤 7단은 이후 꾸준한 성적을 내지 못하며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고 천원전을 우승하며 입신의 반열에 오른 원성진 9단 역시 송아지 3총사(최철한, 박영훈, 원성진)의 일원으로 가장 먼저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빼어난 활약을 한 것은 아니다. 2008한국바둑리그를 우승으로 이끈 이영구 6단도 물가정보배에서 이세돌 9단에게 패퇴한 것과 세계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최철한, 부활할 것인가?

최철한 9단의 부진은 상당히 심각하다.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해 그 철옹성의 이창호 제국을 하나 둘 씩 정복해 나갔던 ‘체 게바라’ 같았던 그가 어인 일인지 끝을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2005년 랭킹제가 도입된 이후 2006년엔 잠시나마 1위에 머물기도 했던 최철한 9단은 현재 랭킹 13위로 주저앉은 상태다.

GS칼텍스배를 이세돌 9단에게 빼앗기면서 무관이 된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타이틀 사냥소식은 들리는 바가 없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큰 부진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 알 순 없지만 2008년에도 이런 침체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다시 정상권에 진입하기가 꽤 힘들 것으로 보여 진다.

2008년 현재까지 5승 3패. 명인전과 전자랜드배 본선진입에 모두 실패했고 KBS바둑왕전에선 1회전에서 탈락했다. 지난해 45승 35패 56%의 승률로 최악의 한 해를 보냈던 그가 2008년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중요한 것은 최철한 9단의 바둑이 기세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올인바둑’으로 불릴 정도로 한 번 기세를 타면 활화산같이 용솟음을 치지만 기세가 한 번 꺾이게 되면 끝을 모르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대회가 즐비하게 열리는 2008년은 최철한 9단에게 부진 탈출의 계기가 될 수 있다. 2003년 국수전에서 이창호 9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직후 파죽지세의 흐름을 보였던 그였기에 돌파구만 마련된다면 지금의 부진은 얼마든지 털어낼 수 있다고 본다. 지난기 응씨배 준우승자로 시드를 받게 되면서 올해 다시 한 번 응씨배를 밟는다.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최철한 9단이 응씨배를 계기로 부진탈출에 성공했으면 한다. 응씨배 준우승을 하면서 누구보다 아파했을 그가 그 아픔의 무대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없으리라.

2008년에도 한국의 주도권은 계속된다!

한국 정상급 기사들에 대항할 중국 기사들은 구리 9단과 창하오 9단, 콩지에 7단 등이 손꼽힌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사들은 구리 9단과 창하오 9단인데 불행히도 중국은 이 두 명의 기사에게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기사들 중 세계대회에 우승한 기사들은 지금까지 모두 6명. 마샤오춘 9단을 시작으로 위빈 9단, 창하오 9단, 구리 9단 등이 있지만 우승횟수가 한 차례에서 두 차례에 그치고 있다. 쟁쟁한 기사들과 두터운 허리층을 자랑하는 중국이라지만 실질적으로 골 결정력면에선 한국보다 현저히 저조하다는 것이 심각한 취약점이다.

2008년 세계무대에도 한국의 독주는 계속되리라 감히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천야오예나 저우루이양 같은 촉망받는 신예기사들이 폭발적인 성적을 내지 않는 이상 한국의 정상3인방과 랭킹 10위권 기사들의 연합 전선을 뚫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10년 가까이 세계무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경쟁상대로 많이 부족하다. 기성 타이틀 보유자로 실질적인 일본랭킹1위인 야마시타 게이코 9단과 본인방 다카오 신지 9단이 세계대회에서 준결승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그 중 장쉬 9단과 요다노리모토 9단의 분전은 상당히 놀라운 일인데 이들 두 명 외에는 눈에 띄는 기사들이 없다는 것이 일본 바둑의 불행이다.

2월말부터 농심신라면배 최종라운드가 펼쳐진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우승다툼이라는 다수의 견해 속에서 이창호 9단과 박영훈 9단이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위해 출사표를 던진다.

아무튼 2008년은 우리 바둑팬들에게 즐거움이 가득한 한 해다. 한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쟁탈전도 그렇고 국내 정상급 기사들의 치열한 선두경합도 눈을 떼어놓기 힘들다. 우리들은 그저 응원과 격려를 더해 주고 그들의 강렬한 붙임수에 환호성을 질러주면 우리 기사들은 그것으로도 충분한 힘을 얻을 것이니 지금부터 응원할 준비를 하는 것은 어떨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