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후두둑….’

푸르른 산록을 축복하듯 7월의 장맛비가 대지를 한껏 적셔옵니다. 유리창을 수놓는 빗방울들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녀석들은 진한 옛 추억들을 한 움큼 흩뿌리고 곤두박질치네요.

그 때나 지금이나 깜빡 깜빡 하는 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국민학교 시절 ‘내일 비 온다 하니께 꼭 우산 챙겨가지고 가래이’란 외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깜빡하다…, 수업이 모두 끝마칠 무렵엔 ‘아차차!’를 연발하면서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가던 일.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시곤 ‘아이고,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구마잉~ 데운물 틀어놓을껜 어여여 들어가 씻그래’하시며 손자의 깜빡거림은 그저 뒤에다가 숨겨놓기기만 한 기억들. 2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은 흐뭇한 추억으로만 남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가슴 한구석을 아련하게 만드네요.

흐린 창문을 세차게 두들기던 빗줄기가 오후 들어선 조용해졌습니다. 간만에 맛보는 휴일 한 구석, 달콤한 커피 한 잔 입술에 적시며 좋아하는 기보 하나 늘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책꽂이를 떠듬떠듬 거립니다.

가끔씩 살아가는 게 힘에 부칠 때…, 알 수 없는 적막함이 온 몸을 사로잡을 땐 간간이 바둑으로 위안을 얻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런걸 보고 있노라면 저도 영락없는 바둑꾼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네요.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으로 만지작거렸던 차디찬 바둑돌 감촉이 지금에 와선 첫사랑의 설레는 감촉마냥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온 것이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집니다.

기우님들은 어떤 바둑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요? 제가 반상위에 주욱 늘어본 기보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둑입니다. 1988년에 두어진 제1회 후지쯔배 다케미야 마사키 9단과 린 하이펑 9단의 결승국.

옆의 기보를 볼까요? 누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수가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저는 주저 없이 흑1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칭위엔 9단이 4선과 중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면 다케미야 9단은 그 패러다임을 근본으로 ‘우주류’란 그만의 화려한 초식을 내세운, 20세기 최고의 낭만파 기사라 칭찬하고 싶네요.

흑1의 수! 단순히 어깨짚는 수가 아닙니다. 중앙을 향한 무한한 자유로움과 세상 모든 부조리함에 대항하고픈, 강렬한 투쟁심이 심장을 마구 두들겨대는 수입니다. 이 바둑을 처음 봤을 때 저의 기력은 5급 정도였죠. 그 때는 ‘아, 이런 바둑도 있구나. 뭔지는 잘 모르지만 멋있는 수네!’하며 한 번의 감탄으로 끝날 것 같았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을 뜨겁게 해주고 온 몸의 날줄과 씨줄을 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아주 짜릿한 카타르시즘이 전해져오는 명수라고 단언하게 합니다.

하하! 제 과장법이 너무 심한가요? 글쎄요, 바둑의 신이 본다면 저 수가 저 장면에서 최선의 수는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독한 승부의 결과만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프로의 세계에서 저런 수를 과감히 둘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있을까요? 넓디넓은 자유로운 발상과 중앙에 꿈을 그릴 수 있는 도전정신이 아니라면 결코 쉽게 둘 수 있는 수가 아니라 자신합니다.

지금 다시 봐도 멋있습니다. 뛰어난 수읽기를 보여주며 공격과 타개가 섬뜩하리만큼 불꽃을 튀는 명국은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 어떤 기보보다도 이 기보가 가장 멋있습니다. 다케미야 9단은 이 수를 놓으면서 어떤 손맛을 느꼈을까요? 돌통에 흑돌 한 개 슬쩍 집어 들어 반상에 ‘쿵’하고 찍어댄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봅니다.

바둑은 좋습니다. 이기면 좋고 지더라도 배울 게 있으니 더더욱 좋습니다. 수없는 시절을 거슬러 오면서 현자들이 남겨 놓은 기보를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도 더 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마지막 수까지 다 메웠네요. 바둑돌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면서 저의 생활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복기를 해봅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흐리디흐린 먹구름이 모두 물러간 하늘은 5살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한없이 투명하네요. 유리창 틈새로 들어온 작은 햇살 한 줄기가 바둑알을 살짝 어루만져 주는 것에 투명한 미소를 지어봅니다.

“나는 예전부터 기보를 놓아보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도사쿠 선생, 슈사쿠 선생, 죠와 선생. 그 밖에 여러 고수들의 바둑을 놓아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점차 그분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일종의 삼매경이라고 할지, 도원경이라 해야 할지…. 완전히 무아의 경지가 되어 도사쿠 선생이나 슈사쿠 선생이 한 수 한 수마다 저에게 은밀히 말을 걸어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고바야시 고이치 9단